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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수채화 같은 봄날이 간다

by 훈 작가 2024. 4. 24.

깜박 졸고 있는 사이, 봄이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물에 들어간 봄, 어느새 물감을 풀어놓습니다. 세상이 연초록으로 변했습니다. 호수는 제 모습을 감추고 봄과 한 몸이 된 겁니다. 물빛과 봄이 어우러진 연초록이 수채화 같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귀신 곡할 노릇입니다. 봄이 이런 재주를 부리다니. 

바람마저 잠들었습니다. 덩달아 깜박 졸다 잠이 든 모양입니다. 나른해지는 봄날입니다. 호수가 캔버스가 되어 연초록 가득한 그림에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봄이 미리 준비한 물감으로 초라해 보이던 산과 들을 바꾸어 놓더니 맑은 호수마저 풍경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봄이 그린 수채화는 상상 이상입니다.

봄이 화가로 변신하기로 마음먹은 건 물빛 때문일 겁니다. 봄이 호수를 유혹한 건지, 호수가 봄을 유혹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봄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화가 뺨칠 정도로 실력을 한껏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사진을 찍고 보니, 봄의 변신이 만들어 낸 미학이 누가 봐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은 취미로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진은 이제 조금 안목이 생긴 것 같습니다. 봄의 정취가 담으러 출사 장소에 나와 사진을 찍다 보니 가는 봄날이 아쉬워 조금 과장해서 표현했습니다.

연초록의 봄날 풍경이 수채화처럼 보인 것은 반영 사진의 묘미입니다. 반영 사진은 물빛이 담아낸 자연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모든 풍경이 수채화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이 있다고 해도 빛이 연출하는 상황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림 같은 사진은 날씨가 많이 좌우하고, 시간도 중요하고, 운도 따라야 합니다. 

봄은 짧습니다. 갈수록 짧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봄이라 아쉬움이 많은데, 더 빨라진 느낌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날씨 때문인지 봄이 갈 채비를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신록의 5월 같은 봄을 4월에 만난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봄도 빠른 걸 좋아하는 한국인의 성질을 닮아가는 모양입니다.

짧아서 아쉽습니다. 봄이란 계절은 더 그렇습니다. 여름이나 겨울이 아쉽다는 사람은 주위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길어지는여름은 더워서, 겨울은 추워서 더 싫습니다. 수채화 같은 봄이 예전처럼 우리 곁에 오래 머물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성질 급한 것만은 제발 닮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짧은 건 봄만이 아닙니다. 대개 꽃으로 머무는 시간은 짧습니다. 절정의 순간은 길지 않습니다. 인생의 청춘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봄을 청춘에 비유했을지도 모릅니다. 돌이켜 보니 젊은 날의 청춘이 수채화 같았던 봄날이었습니다. 봄날 꽃이 피고 지는 건 절정이자 찰나인 것을,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 그랬던 봄날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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