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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물-멍 때리기

by 훈 작가 2024. 4. 22.

멍 때리기 대회를 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의아했습니다. ‘골 때린다’ 말은 들어 봤어도 '멍 때리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멍 때리기 대회를 열 정도면 우리 사회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졌고, 디지털 문명이 만든 사이버 공간에 빼앗긴 삶이 많아졌기 때문에 생긴 이런 신조어가 등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거나,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넋 나간 것처럼 있었던 일 말입니다. 멍 때리는 게 예전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하는 말이었을 텐데, 아마 요즘은 정신적인 휴식이나 쉼의 개념으로 이 같은 말을 하는 모양입니다. 개념이 긍정적으로 바뀐 셈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디지털 시대는 육체적인 노동보다 정신적인 두뇌활동이 많아졌기 때문에 긍정의 의미로 쓰는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면 멍 때리기는 내 정신을 무언가에 빼앗기는 겁니다. 생각을 빼앗겨 버리니 아무 생각이 없는 정신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 특히, 일출 사진을 찍기 전, 여명 빛을 보노라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는 출사 현장에서 일출 전 여명 빛-멍에 빠지면 어느새 황홀함에 빠져듭니다. 그냥 멍하니 보면 영혼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도 멍-때리기를 하러 온 건 아닙니다. 연초록이 물들어 가는 춘 사월의 풍경을 담으러 나온 것뿐입니다. 일출 시간이 빨라지니 출사 장소에 도착하는 시간도 그만큼 빨라집니다. 달콤한 새벽잠을 포기하지 않으면 매직 아워 시간대를 놓치게 되니 겨울과 달리 좀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늘 그렇듯 매직 아워 시간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새벽 출사는 눈 뜨자마자 시간에 쫒기듯 나오게 됩니다.

출사지에 도착하니 다소 쌀쌀했습니다. 해뜨기 전이라 숲과 호수는 적막감에 쌓여 있습니다. 산골짜기라 여명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숲에서 잔잔하게 흘러나 오는 상큼한 봄-내음이 더없이 좋습니다. 어둠이 가시면서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듯 '딱딱딱' 소리가 청아하게 근처에서 들렸습니다. 그러나 새는 보이지 않습니다. 멍 때리기와 전혀 다른 힐-링 교향곡이 연주되는 느낌입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입니다. 시시각각 빛이 숲과 호수의 풍경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나 혼자 독차지한 초록의 봄을 마음껏 카메라에 담습니다. 조리개(F값), 화이트밸런스(WB), 화각을 바꾸어 가며 풍경을 담았습니다. 호수를 빙 한 바퀴 돌면서 셔터를 즐기는 사이 두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산 능선 위에서 내려오는 햇빛을 받은 연초록의 봄까지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렇게 찍은 이미지가 170여 장에 이릅니다.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 안으로 들어간 봄 때문입니다. 떠나기 아쉬운 시간입니다. 물끄러미 물을 바라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예고 없이 물-멍이 시작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멍 하니 바라만 봅니다. 마음껏 물-멍을 즐기라는 듯 바람마저 불지 않습니다. 내가 물-멍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물-멍을 즐기긴 처음입니다. 상념에 사무친 속세를 잠시 잊어 봅니다.
 
발길을 돌리니 생각납니다. 아주 오래전 한 여름밤, 무수히 많은 별이 쏟아지는 시골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본 적이 있습니다. 눈이 멀 정도로 별이 쏟아졌습니다. 소년은 언젠가 어른이 되어 별이 되거라 꿈을 꾸었습니다. 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이 된 나. 홀연 그때처럼 별-멍을 하고 나서 사진을 담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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