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붑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바람이 부는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바람이 아닙니다. 지나치기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바람입니다. 신록의 오월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연초록으로 물든 보리밭에 부는 바람이라 정감 어린 느낌이 힐-링으로 다가오는 기분이 듭니다.
‘쏴~악 스르르, 쏴~악 스르르’
한줄기 초록 바람이 연주하고 지나갑니다. 잔잔하던 보리밭이 잠시 일렁였습니다. 연한 초록빛이 윤슬처럼 반짝이더니 잔물결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록의 파도 소리처럼 보리밭에 은은하게 자연의 소리를 만들며 힐-링으로 귓전에 메아리 치기도 합니다. 바람이 이처럼 아름답게 들렸던 기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보리 축제가 한창인 고창 학원농장 보리밭 풍경입니다. 보리밭 풍경 속에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바람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봄바람에 여심이 흔들리는 이유가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람 좋은 날, 초록 물결 넘실대던 고향마을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휘-익’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봄의 햇살을 받은 청보리밭이 은빛처럼 반짝입니다. 까칠까칠한 보리 이삭이 손에 손잡고 바람이 부는 대로 춤을 춥니다. 때론 그 모습이 초록빛 바다처럼 파도를 만들어 냅니다. 파도는 바람과 함께 보리밭을 찾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합니다. 나지막한 환호성이 바람에 실려 날아갑니다. 마치 힐-링 음악회가 열린 것 같습니다.
보리는 엄동설한에도 초록을 잃지 않고 견뎌냈습니다. 생명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잃지 않고 봄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보리는 한때 ‘보릿고개’라는 배고픈 삶의 역사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꽁보리밥의 한이 서린 슬픈 주인공이기도 했죠. 그러나 지금은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진 과거였고, 가난했던 백성의 밥상이었을 뿐입니다.
격세지감이란 말이 딱 맞습니다. 요즘은 보기 힘듭니다. 배고픈 시절의 상징이었던 보리밥이 건강식으로 또는 별미로 즐기려는 사람들이 찾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쌀 소비도 줄고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쌀이 남아도는 시대가 된 것은 배고픈 시절 가난을 이겨내고자 했던 보릿고개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아련했던 추억 속의 시골집 앞마당, 보리타작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요란했던 탈곡기 소리도 들리는 듯합니다. 추임새를 넣어가며 도리깨질하던 어른들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검게 탄 얼굴로 타작이 끝나면 김치 한 조각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허기를 달래던 그 시절 어른들, 이제 모두 옛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보리밭에 담긴 삶의 애환이 어땠는지. 모두 그렇게 사는 가 보다 했습니다. 예전엔 먹고사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지금은 감성적인 시선으로 다가오고, 힐-링의 관점에서 찾게 됩니다. 탁 트인 보리밭 풍경,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 하는 오월, 초록은 더할 나위 없이 힐-링에 좋은 빛입니다. 보리밭을 찾은 사람들, 모르긴 해도 이 때문에 왔을 겁니다. 요즘은 갈수록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힐-링이란 말이 유행처럼 입에 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겁니다. 힐-링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겐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돌아가기 전에 축제 현장에 마련된 천막 식당을 찾았습니다. 마음도 힐-링을 했으니, 몸도 힐-링 할 겸해서 보리밥 한 그릇을 시켰습니다. 카드로 만원을 결제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주문한 식사가 허접했습니다. 인심이 후하다는 전라도 음식, 여기는 야박해보였습니다. 헐! 가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을 걸 그랬나….
보리밭 힐-링은 끝내주었는데, 보리밥은 정말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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