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과 밖이 모호한 상황입니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 이유는 안개 때문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강변 습지, 멀리서 보면 분명 어디서부터 안개인지 보였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안과 밖이 경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실루엣 형체만이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수풀 속 주인공들, 키가 큰 녀석들은 대부분 갈대와 억새들입니다. 녀석들이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도심지 번화가에서 흐느적거리는 풍선 인형을 닮았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아무것도 모르게 바람에 리듬을 타고 즐깁니다. 바람도 좋고, 빛도 좋은 아침입니다.
안개가 만든 고즈넉한 풍경입니다. 내가 불청객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안개가 만든 세상엔 아무런 일도 없고, 일어날 일도 없습니다. 설령 어디선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가 가려 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 남의 일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합니다.
이곳에선 바람도 소리가 없습니다. 바람은 속세의 단어일 뿐입니다. 안개 나라에서는 바람은 음악이고, 소리는 여기서 사는 생명체의 언어일 뿐입니다. 아침 해가 들려주는 빛의 언어에 눈 뜬 새들의 언어마저 내겐 음악처럼 들립니다.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수풀 속 안개와 연인처럼 봄날의 밀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안개 나라에서는 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인듯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지키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안 보이는 게 답답해서 그런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히 여기는 본능인데, 나만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 듭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이런 몽환적 분위기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그러지 못한 탓에 부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본의 아니게 정적을 깨트립니다.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마다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방해하는 느낌이 듭니다.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본능적으로 보고 싶은 그림을 찾느라 안으로 더 들어갔습니다. 욕심입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찍으려는.
이때 바로 앞에서 ‘푸드덕’ 소리가 났습니다. 하늘로 솟구치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꿩이었습니다. 순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침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명 나는 녀석의 생존을 위협할 생각이 없었는데, 꿩은 위협을 느끼고 멀리 날아가 다른 수풀로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곳에선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듣지 않으면 생존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귀가 밝아야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더더욱 안개가 짙은 날일수록 그렇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야생의 세계는 눈보다 귀가 레이더 역할을 합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안개 나라에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숙명일 겁니다. 삶의 꿈을 잃지 않으려면 귀를 열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론 사람도 본심을 안개 뒤에 숨깁니다. 그리고 타인의 꿈을 짓밟아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전세 사기, 금융사기, 보이스피싱, 가스라이팅 같은 범죄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많이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귀가 밝아야 합니다. 멀쩡히 두 눈을 뜨고도 당하는 세상이니까요.
안개가 짙게 낀 날은 눈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귀가 밝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잘 들어야 합니다.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안갯속에 가려진 하이에나 같은 사냥꾼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또 한 명의 전세 사기 피해자가 고귀한 삶의 꿈을 버렸습니다. 살만한 세상이라지만, 아직도 검은 안개가 낀 곳이 많은 세상입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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