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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데이트

by 훈 작가 2024. 5. 20.

기억하기 싫은 흑역사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람맞았던 일입니다. 나보다 못한 것 같은 친구들도 여친을 사귀고 데이트하는 데,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뭐가 문제일까. 결론은 연애 세포가 발달하지 못해 그런거다 생각했습니다. 여자를 만나면 별로 할 말이 없고, 그러다 보면 어색한 분위기 속에 어렵게 애프터 신청을 해도 결과가 뻔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이 문제라면 대학 시절 어떻게 과 대표나 학회장을 했는지, 설명이 안 됩니다. 단과대학 부회장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연애 DNA가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스스로 진단을 내린 겁니다. 상대적으로 키카 작은 것도 아니고, 외모도 나으면 낫지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방이 카페만큼 흔했던 시절, 기다리는 장소는 늘 다방이었습니다. 20분 정도 기다리다 안 나타나면 커피 한 잔을 주문합니다. ‘오늘도 바람이구나’ 하면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탁자 위 아리랑 성냥갑에서 성냥개비 하나씩 꺼내 우물 정(井) 자 탑을 쌓다 보면 한 시간이 지나갑니다. 결국 마지막엔 마시지도 않은 식은 커피값만 치르고 나왔습니다.
 
햇빛 쏟아지는 거리, 오가는 많은 인파, 하나같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 바람맞았구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데, 의기소침한 나머지 얼굴이 화끈거려 숨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데이트족들이 나를 보며 비웃는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감추느라 겉으로 아닌 척하느라 애썼습니다.

걷다 보면, 제일 눈에 거슬리고 보기 싫은 게 즐거운 표정으로 걷는 데이트족이었습니다. 질투였습니다. 젊음의 거리에서 부는 바람이 상처를 파고들었습니다. 자존심에 젖은 눈물을 닦으며 한적한 뒷골목을 찾아 발길을 옮깁니다. 무작정 걷다가 들어간 선술집에서 쓴 소주잔을 비우다가 취기가 돌면 전깃줄에 걸린 쓸쓸한 달그림자에 기대어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로맨틱한 추억이 없는 나의 젊은 날, 연인들을 보면 늘 부러웠습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하며 보낼까. 긴 시간 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걸까. 참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오늘도 출사현장 여기저기 선남선녀가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띕니다. 그때처럼 부럽지는 않지만, 홀연 그 시절의 한 장면이 흑백영화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푸릇푸릇했던 시절의 내게 불었던 봄바람의 추억은 없었습니다. 항상 늦가을에서 겨울까지 부는 찬 바람뿐이었습니다. 그 바람은 이미 청춘을 싣고 세월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대신 남은 건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입니다. 지금 난 잃어버린 낭만을 느껴보려고 태양과  바람이 일구어 놓은 청보리밭에서 계절의 여왕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습니다.

풍경 속에 데이트하는 선남선녀가 많이 보입니다. 사람이 들어간 풍경을 찍다 보니 그들입니다. 어떤 커플은 처음 만나하는 데이트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커플은 연인으로 즐기는 데이트일 수도 있을 겁니다. 각각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는지 알 순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사랑을 위한 데이트는 계속 이어지리라 믿고 싶습니다.
 
데이트는 설렘과 기대가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의 감정을 키워가는 시간을 만드는 게 데이트입니다. 조심스럽게 호감도를 높여가며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엔 탐색전에 가까운 밀당도 있을 겁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좋은 추억을 알콩달콩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런 추억이 없고, 바람맞은 것만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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