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착색된 낡은 알루미늄 그릇에 까맣게 물든 칫솔 한 개 그리고 비슷하게 물든 플라스틱 빗 한 개 거울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엄마, 왜 불렀어?”
“이걸로 희게 보이는 머리를 살살 문질러.”
엄마가 염색약이 묻은 칫솔을 주며 말했습니다. 염색이 끝날 무렵 손에 잘 닿지 않는 뒷머리는 항상 내게 시키곤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흰머리에 칫솔을 갖다 대고 문질렀습니다. 염색약 심부름도 언제나 내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양귀비’ 하면 염색약인 줄로만 알았었습니다.
이후, 양귀비란 말은 다시 만난 건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양귀비는 염색약이 아니라 꽃 이름이었고, 예쁜 여자를 비유할 때는 역사 속의 여인이었습니다. 영국과 청나라 간에 벌어졌던 아편전쟁으로 꽃이름을 알렸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으로 등장할 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불릴 정도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당나라를 쥐락펴락했던 당 태종의 총애를 받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배우면서 양귀비꽃을 처음 봤습니다. 아편과 관련 있는 양귀비꽃이 아니라 관상용 개양귀비꽃이었습니다. 꽃양귀비라고도 부릅니다. 진짜 양귀비꽃보다는 작고 가냘프다고 합니다. 꽃대에 털이 있는 게 개양귀비꽃이고, 없는 게 진짜 양귀비꽃이라고 합니다. 앞에 접두사 ‘개’ 자가 붙어있다는 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개’ 자가 붙은 우리말은 별로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게 없습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개떡’이 생각납니다. 말이 떡이지 실제는 이름값도 못하는 떡입니다. 배고픈 시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떡 흉내만 내서 만든 떡에 불과합니다. ‘개살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구와 비슷하게 생긴 과일이지만, 사실은 과일 축에도 못 끼는 무늬만 과일입니다.
개양귀비꽃은 초나라 항우의 애첩이었던 우희(우미인)의 무덤에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부릅니다. 유방의 군대에 포위됐을 때, 항우는 그녀와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걱정하는 시를 읊자, 그녀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시를 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훗날 그녀의 무덤에서 핀 꽃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진짜와 다른 것을 이름을 지을 때 접두사로 ‘개’ 자를 붙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은 꽃 이름 중에 대표적으로 ‘개꽃’입니다. 개꽃은 철쭉꽃을 말하는데 진달래와 비슷합니다. 어른 들 말로는 진달래는 먹어도 좋지만, 철쭉은 독성 때문에 먹을 수 없어서 그렇게 불렀답니다. 진달래와 비교할 때 철쭉은 가짜인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개양귀비꽃도 짝퉁입니다. 양귀비와 우미인이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인 건 맞습니다. 그러나 우미인이 양귀비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미인이란 겁니다. 그래서 개양귀비꽃입니다. 그렇지만 어감이 좋지 않기 때문에 ‘개’ 자를 빼고 양귀비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은 양귀비가 아니라 우미인초이고, 개양귀비꽃인 겁니다.
양귀비꽃이라 부르는 이유는 진짜 양귀비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편때문에 법적으로 재배 금지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짜가 진짜처럼 대접받는 꽃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는 개양귀비꽃이지만 우린 '개' 자를 빼고 양귀비꽃이라 불러줍니다. '개' 자를 빼고 나니 듣기 거북하지 않습니다. 어감도 훨씬 부드럽고요. 어쨌거나 앞에 '개' 들어가는 우리말은 않좋은 게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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