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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나는 흙 수저 꽃입니다.

by 훈 작가 2024. 7. 18.

세상엔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나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곳에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하늘을 볼 수 없고, 햇빛도 만날 수 없는 곳입니다. 척박해도 너무 척박한 곳입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더러운 진흙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흙탕물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답답해도 많이 답답합니다. 이런 곳에 살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왜 이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난 꽃이라 행복합니다. 꽃이란 이름만 들어도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꽃이란 존재로 날 태어나게 해 준 흙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태어난 환경만 생각하면 없지 않아 원망스러운 점도 있지만, 원망한 들 어쩌겠습니까. 그런다고 지금의 상황이 바뀔 리 없는데. 그래서 마음먹었습니다. 운명을 탓하느니 스스로 노력해 세상에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고 사랑받는 꽃이 될 거라고.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 뻥 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난 씨앗일 때부터 생명력이 강한 DNA를 물려 받았습니다. 척박한 환경 때문일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단단해 망치로 때리거나 불로 지져도 난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속된 말로 거짓말 같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내가 씨앗 상태로 오래 견디는 것도 놀랍지만, 발아하는 성장 속도도 빠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사는 습지나 연못을 순식간에 내 삶의 터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더러운 흙탕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에 평소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나는 꽃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물 속에서 산다는 건 생각보다 고된 삶입니다. 빛이 들지 않기에 다른 꽃보다 몇 배 노력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줄기나 잎도 물에서 견디려면 더 크고 강해야 합니다. 빛이 잘 드는 정원이나 화단에서 사는 꽃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흙탕 물속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잎을 크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난 지름이 30~50cm 정도로 둥근 모양의 큰 잎을 만듭니다. 잎은 뿌리줄기에서 나온 긴 잎자루에 달리게 만들고, 잎자루 안에 뚫려 있는 구멍은 땅속줄기의 구멍과 연결하여 삽니다. 이는 빛이 어린잎이 꽃잎과 더불어 수면 위에 떠 방패 모양으로 펼쳐지도록 해 물에 잘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잎의 잎맥이 사방으로 퍼져 있지만 가장자리가 밋밋합니다.
 
난 보통 7월 꽃을 피웁니다. 요즘은 기후 온난화로 조금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연분홍이나 흰색 꽃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냅니다. 꽃줄기마다 하나씩 꽃을 만드는데 얼굴이 큰 편입니다. 속세의 여자들은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데 난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밤에는 오므라들었다 아침이면 다시 피는데,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마치 사바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고 해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속세의 인간 세상에서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는 말이 한때 많이 유행했습니다. 태어난 환경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일 겁니다. 그러다 보니 흙수저까지 나왔던 것 같습니다. 부의 대물림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들이 만든 신조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힘든 현실 때문에 자조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보니 이런 말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정말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원조 흙수저입니다. 어디 원망할 데가 없으면 부모를 탓합니까. 부모를 부정한다면 지금의 나도 없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더 이상 심한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저 탓은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진정한 흙수저인 나도 이렇게 꽃을 피웠습니다. 흙이 없다면 난 꽃이 될 수 없습니다. 난 흙이 진심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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