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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건반 위를 걷는 여자

by 훈 작가 2024. 7. 22.

비가 내립니다. 예전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아왔던 여름철 장맛비가 아닙니다. 내리는 비의 양도 장난이 아닙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예년에 내리던 호우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용어인 극한 호우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것도 낮에는 적게 내리다 밤에 집중적으로 한 지역에 퍼붓는 비라서 피해가 더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기후 현상이 매년 되풀이될 것으로 예견합니다.
 
거세게 내리치는 빗방울이 바람에 날리고, 거실 유리창에도 부딪혀 흘러내립니다. 여름이 소리치며 우는 것 같습니다. 번개가 번쩍이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흔들어 이에 빗방울이 놀라 어디론가 숨고 싶은 모양입니다. 낭만과 감성을 자극하는 비를 기대했는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그윽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비 오는 날의 서정을 즐기고 싶은데 이와 너무 먼 분위기입니다.
 
먹구름이 다 지나가니 소란스럽던 비가 조용해졌습니다. ‘비멍’을 즐겨 볼까, 하고 다시 창가로 다가가 봅니다. 카메라를 들고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날씨라서 차라리 ‘비멍’을 하는 게 낫다 싶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창 너머 아파트 단지 뒤 횡단보도에 오렌지색 우산을 쓴 여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간 이것도 그림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른 스마트폰을 가져왔습니다.

살짝 창문을 열고 구도를 잡은 후 스마트폰 카메라 앱을 클릭해 기다리는 모습부터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까지 찍었습니다. ‘비멍’을 하려다 얼떨결에 찍은 겁니다. 오렌지색 우산이 강렬한 느낌이 들어 일단 찍어보고 싶었습니다. 아주 멋진 사진은 아니겠지만 이런 사진도 비 오는 날의 감성이 묻어날 것 같은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우연이지만 이런 장면도 사진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했던 겁니다.
 
곧바로 이미지를 컴퓨터로 옮겼습니다. 제목을 붙이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키워드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사진은 단순합니다. 횡단보도와 우산을 쓴 아가씨 그리고 아래쪽 신호등이 전부입니다. 뚫어져라 사진 속 피사체를 바라보았습니다. 제목을 붙일 만한 소재가 있을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진을 소제로 글을 포스팅할 때 종종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끝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비와 관련된 제목을 붙이려다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잠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시 창가로 가 사진을 찍은 횡단보도를 보았습니다.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립니다.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와 피아노 소리! 절묘한 느낌이 들면서 하얗게 표시된 횡단보도가 피아노 건반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우산을 쓴 아가씨는 건반 위를 걷는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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