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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취하긴 했는데

by 훈 작가 2024. 8. 9.

왜 취하고 싶은가.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맨 정신으로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자살률이 우리보다 높다는 러시아 사람들이 독한 보드카를 물처럼 마시는 이유도 우리와 비슷한 모양입니다. 하기야 허구한 날 우크라이나와 끝이 안 보이는 전쟁 때문에 끌려가야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겁니다.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특별히 벗어나거나 해소할 방법도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야 하니 따뜻한 조직 문화보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냉혹하고 비정한 조직 문화에 익숙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오는 인간적 절망감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을 견디기 위해선 술이라도 마셔야 하는 세상입니다.
 
혹시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녀석이 깜짝 놀라 뛰쳐나옵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고 천천히 끓이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1872년 독일의 생리학자 하인즈만 실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취하면 서서히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또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신은 자신이 파멸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먼저 권력에 취하게 만든다며, 취해서는 안 되는 3가지를 교만, 중독, 권력이라 했습니다. 취하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욕정에 취하면 육체가 즐겁고, 사랑에 취하면 마음이 즐겁고, 사람에 취하면 영혼이 즐겁다고. 어떤 것이든 취하면 즐겁습니다. 그럼, 취하면 어떤 기분일까. 꽃향기에 취하든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든, 때론 차원이 성취감에 취하든, 취하면 쾌락을 느끼게 됩니다.
 
취하게 만드는 건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피해야 할 건 중독입니다. 중독에 빠지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니까.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알코올, 도박, 마약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면 여색입니다. 취하면 빠져나올 수 있지만 중독에 빠지면 빠질수록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경험상 술에 취하면 무릉도원을 헤매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술이나 여자가 아니라, 글쓰기나 사진에 취하면 영혼이 오염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취하면 시나 소설같은 작품이 나옵니다. 더 깊이 오래도록 빠지다 보면 남들이 오르지 못하는 경지에 오르게 되어 멋진 문학작품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취하는 건 나쁜 게 아닙니다. 술도 기분 좋게 취하면 하루가 즐겁게 지나갑니다. 화초에 심취하면 열흘쯤 간다고 합니다. 나는 사진과 글에 취하지 몇 년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땐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도 취한 상태입니다. 다만, 사랑받을 할 만한 작품은 없을 뿐입니다. 취하긴 했는데 아직 덜 취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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