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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오해’라는 바다

by 훈 작가 2024. 8. 16.

어둠 속 저 멀리서 바다가 다가온다. 사랑의 속삭임은 은밀하다. 밤 해변은 여름을 벗긴다. 태양이 침몰한 해변은 로맨틱한 밤이다. 파도의 손길이 부드럽다. 해변은 파도에 몸을 맡긴다. 화상으로 얼룩진 상처를 파도는 어루만져 준다. 상처가 남긴 아픔은 파도에 실려 어둠의 바다로 잠긴다. 사랑은 상처를 아물게 한다.
 
인파로 뒤덮였던 해변, 이제야 숨을 돌린다. 환호와 이우성이 사라진 해변은 적막하다. 그 공간에 남은 건 벌거벗은 해변과 밤바다의 속삭임뿐이다. 파도는 마지막 남은 태양의 열기까지 지워버린 후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널 찾은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여름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몰랐었다. 날 사랑하기에 찾은 줄만 알았다. 그들이 어둠이 무서워 떠난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인간은 이기적이고 밤을 두려워 한다. 여름날, 해변의 낭만을 즐기러 온 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피서를 핑계삼아 잠시 현실도피를 한 셈이다. 날 사랑하기에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건 착각이었다.

해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이 밤이 낭만이라며 술잔을 기울인다. 수다스러운 소리가 밤 해변을 서성인다.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여름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젊음과 지쳐 보이는 영혼을 달래려는 듯한 환성이 메아리치듯 밤하늘에 퍼진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희미한 불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파도는 그들과 얼싸안고 사랑을 나누었다. 여름이 젊음과 낭만의 계절이라 외치며. 난 파도가 바람둥이라 생각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거리낌 없이 서로 맨몸을 비벼가며 지나칠 정도로 애정 표현을 나누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격했고 뜨거움이 넘쳤다.
 
그게 못마땅했다. 파도는 늘 위선적인 존재라 생각했다. 그런 파도가 밤마다 슬그머니 찾아왔다. 뻔뻔스러웠다. 어떻게 두 얼굴로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진심이 뭘까. 진정 어린 사랑이 있긴 한 걸까. 그래서 파도를 미워했다. 그가 내게 보이는 이중적인 행동이 너무 속이 보이지 않은가.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밤이 왔다. 어쩔 수 없이 파도와 단둘이다. 저 멀리 해변을 밝혀 주는 가로등 불빛이 우릴 지켜본다. 그때 파도가 똑같은 말을 하며 다가왔다.
 
“오해하지 마. 낮엔 사람이 많아 너에게 올 수 없을 뿐이야.”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 아닐 거라 여겼고, 파도는 늘 그렇게 작업을 걸어왔었다. 마음을 열지 않았고, 냉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변함없이 날 찾아왔다. 그만큼 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파도는 그러질 않았다. 그러다 오늘에서야 마음을 열고 파도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바다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엔 저마다 바다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때론 건너기도 하고, 끝내 건너지 않기로 마음먹기도 합니다. ‘오해’라 불리는 바다입니다. ‘오해’라는 바다는 폭풍과 격랑이 몰아치는 망망대해가 아닙니다. 다만, 감정이란 파도가 일렁일 뿐입니다.
 
밤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 있어도 파도로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늘 그대를 향한 마음은 일편단심이라고. 한여름 해변을 찾은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바다를 찾은 게 아닙니다. 잠시 바다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필요에 따라 만난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해만 남깁니다. ‘오해’는 당신이 만든 바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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