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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초록의 기억

by 훈 작가 2024. 8. 14.

초록의 풋풋함이 묻어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여름의 숲처럼 새들의 보금자리를 품어주고, 녀석들의 경연 무대를 만들어 주며 노래를 들어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저녁이면 풀벌레 소리마저 정겹던 여름, 청년은 보송보송한 솜털 피부를 벗어던지고 연초록의 얼굴로 그해 여름, 20대의 나이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린 연둣빛 나이를 넘어서니 짙은 초록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에게 속삭이는 감성을 깨닫게 되었고, 여름의 숲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과도 수줍은 미소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청년이 되었던 나. 저 높은 세상을 향해 힘껏 날개를 펼치고, 꿈과 사랑을 향해 날아갈 것 같은 기개를 펼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그 초록의 숲을 거닐어 봅니다. 여전히 초록의 향기는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초록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니 생각납니다. 지난날의 초록은 분명 내게 거리낄 게 없었는데, 이따금 기억에서 사라진 내 청춘의 희미한 그림자가 트라우마처럼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초록은 풀잎나뭇잎이 어우러진 숲의 상징색입니다. 자연과 환경을 말할 땐 초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육군으로 병역의무를 치른 남자라면 초록은 묘한 감정을 불러오는 색이기도 합니다. 육군 전투복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시절의 초록은 낭만을 클릭할 수 없었던 시절입니다.
 
초록은 군 복무를 마쳐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해방된 기분으로 제대했는데 예비군 훈련 때면 또 입어야 합니다. 초록 패션은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끈끈한 애정을 보입니다. 이상하게도 다시 제복을 입으면 달라집니다. 멋과 낭만의 품격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자연의 초록은 늘-링과 희망을 줍니다.
 
초록빛 여름이 산야를 무성하게 짙게 물을 들인 지 오래되었습니다. 7년의 세월을 침묵으로 지내다 깨어난 매미들이 저마다 초록의 숲으로 들어가 사랑의 연가를 노래하는 여름입니다. 녀석들에겐 초록이 사랑과 희망의 색입니다. 한때 초록이 내게 트라우마 같은 색이었지만, 더위에 지친 모두에게 사랑과 희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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