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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우물이 있던 시절

by 훈 작가 2024. 8. 19.

동네 아낙네들의 수다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듯합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며 아랫집 뒷집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던 시절, 개똥이네 집은 딸만 낳다가 이번에 아들을 봤다는 둥, 순이네가 송아지 낳았다는 둥, 이장 집 막내딸이 시집간다는 둥 별별 소식이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이웃집 담장을 넘게 됩니다.
 
한나절이 우물가는 빨래터가 됩니다. 여인들의 고된 시집살이는 여기서 잠시 멈춥니다. 어른들 눈치 볼 것 없이 토해내는 시어머니 흉보기도 웃음소리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넘겨버립니다. 아낙네들 속을 썩이던 남정네들을 떠올리며 방망이로 빨래를 연신 두들기기도 합니다. 쌓였던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어대듯 팔에 힘을 주어 내리쳤을 겁니다.
 
한바탕 휩쓸고 간 동네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끊긴 우물가, 모처럼 고요 속에 휴식을 취합니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하늘거립니다. 이웃과 정이 오가던 소박한 우물가는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들녘 건너 물안개 핀 산 능선,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 무지개가 뜨던 고향 마을의 정취가 그립습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던 아낙네들,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아이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걸음을 재촉하던 여인들, 빨래하면서 시어머니 흉보던 며느리들, 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찾지 않은 우물. 무성하게 자란 풀숲에 갇혀버린 우물, 이제 그 시절이 추억으로 묻혀  자연으로 돌아가는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우물이 없습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릅니다. 아니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가는 정이 있을 수가 없고, 싹이 틀 수도 없을 겁니다. 간혹 엘리베이터를 타면 마주치는 얼굴들, 보긴 본 것 같은데 서먹서먹하죠. 보는 게 민망하니 서로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돌리며 피하게 됩니다. 고향마을 우물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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