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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꽃무릇

by 훈 작가 2024. 9. 23.

花葉不相見 想思草

화엽불상견 상사초

 

꽃은 잎을,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는 꽃무릇. 한 뿌리에서 자랐음에도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꽃입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함으로 남다 보니 꽃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슬픈 사랑)이라고 합니다. 꽃무릇은 가을꽃 같지 않게 꽃이 진 다음 잎이 돋는 걸 보면 돌연변이 꽃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꽃말이 그렇듯, 꽃무릇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 있다고 합니다. 한 절의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으로 죽어 묻었는데, 무덤에서 핀 꽃이 꽃무릇이란 설도 있고, 한 사찰을 찾은 아름다운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 꽃무릇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꽃을 보면 모양이 특이합니다. 자세히 보면 여자들이 화장할 때 속눈썹을 말아 올린 것 같은 모양입니다. 마치 마스카라로 검고 이쁘게 보이도록 화장한 여인의 속눈썹이 같기도 합니다. 한껏 치장한 것 같은 꽃모습이 남정네들을 유혹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이 배어 있는 듯 보입니다.

 

꽃대를 보면 가녀린 여인의 몸매를 보듯 날씬합니다. 그 끝에서 붉게 피어오르는 꽃무릇. 그리움에 사무쳐 멍든 것처럼 외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무리를 지어 서로서로 그리움을 달래려는 듯 꽃이 핍니다. 잎이 없이 달랑 붉은 꽃송이만 피는 게 독특하면서도 화려한 왕관을 쓴 여왕을 떠올립니다.

꽃무릇이란 이름도 무리를 지어 꽃이 핀 모습을 보고 꽃의 무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숲속에 무리 지어 핀 꽃무릇을 멀리서 보면 빨간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달리 보면 불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가을에 꽃무릇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꽃도 없을 겁니다.

 

꽃무릇은 붉은 가을을 서막을 알리는 전령사이기도 합니다. 보통은 9월 중순이나 추석 때쯤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가을 숲의 초록이 짙을 때 피기 때문에 붉은 꽃이 더 애절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걱정인 것은 여름이 갈수록 길어진 탓에 꽃이 혼란스러울 것도 같습니다. 여름 같은 9월이면 피어야 할지 말지 꽃이 헷갈릴 겁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보니 여름 같은 추석 명절을 보냈습니다. 여름이 가을 영역까지 밀고 들어온 걸 보면 갈수록 가을이 더 짧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다 보면 꽃무릇도 더 늦게 필 겁니다. 늦게 피더라도 예년처럼 풍성하게 피었으면 좋겠습니다. 열흘 남짓 피고 지는 꽃무릇이 늦게 핀다는 소식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기상이변이 몰고 온 자연현상 때문에 한편으로 걱정입니다. 꽃말처럼 가을과 꽃무릇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애틋한 꽃인데 이 가을과 영영 헤어지게 된다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부디 이런 생각이 맞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이여!  이 계절이 더 이상 여름에게 침략당하지 않게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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