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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노을 진 억새밭에서

by 훈 작가 2024. 10. 7.

고독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가을이 그런 계절입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콕짚어 말할 수 없는 답답함도 훌훌 털어내고 싶고요. 고요와 적막이 뒤섞인 곳을 거닐다 보면 외롭게 느껴지는 이 마음을 누군가 달래 줄 것 같은 생각이 막연하게 듭니다. 그때 누군가가 고독이었으면 합니다.

 

저물어 가는 가을 저녁, 억새밭을 혼자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노을이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이죠. 은빛 억새 물결이 출렁입니다. 가을이 고독을 품에 안고 슬픈 표정으로 춤추는 것 같습니다. 다가올 이별 무대가 언제 인지 알고 있지만 모른척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을은 언제나 올 때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온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해 질 무렵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알 겁니다. 가을은 야속하다는 걸. 발레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선 억새들의 변신은 우울해 보입니다. 자신들이 머물다 가야 하는 시간이 너무 짧은 걸 알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아니면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무대에 설 수 없는데, 가을이 찾아오는 순간 떠나려 하니 서운한 겁니다.

 

바람이 내려옵니다. 무대에 늘어선 무희들을 위해서 온 겁니다. 리듬을 품에 안고 온 바람은 음악이 됩니다. 바람은 가지고 온 리듬을 오선지에 옮겨 소리를 만듭니다. 눈부신 은빛 향연이 서막이 오른 겁니다. 일사불란하게 일렁이는 몸짓은 백조의 호수 무대에 나오는 발레리나의 춤사위를 빼닮은 듯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고독이 아름다운 건 처음입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고독, 노을 지는 가을 억새밭에 서 본 사람만 알 겁니다. 그저 잡초로만 여겼던 사람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장미같이 화려한 꽃만 아름답다고 언어의 성찬을 늘어놓던 사람들은 더 반성해야 합니다. 꽃들이 시들고 볼품 없어지니 억새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고 에둘러 말합니다.

 

고독은 많고 많은 그림자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 많은 고독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많은 이의 마음속에 있을겁니다. 그런 고독은 어두운 곳에서 싹이 틉니다. 빛을 싫어하거든요. 별로 가까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가을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느낄 겁니다. 진정한 고독이 어떤가를.

 

아름다운 고독입니다. 이런 고독을 좀 더 가슴에 간직하고 싶고, 좀 더 빠져들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그래,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순간을 만나면서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하는 고독입니다. 더불어 삶을 열정적으로 더 불태우게 만드는 고독입니다. 자신을 어둠의 자식으로 만드는 그런 고독이 아닙니다.

 

고독은 인간만이 그리워하고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자학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나를 새롭게 깨우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특히, 이 가을에 만나는 고독이 그런 시간입니다. 중요한 건 고독을 술과 함께 만나거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만나지 말라는 겁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노을 지는 억새밭에 한 번 서 보기 바랍니다.

 

노을 지는 억새밭에 서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아름다운 고독이 어떤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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