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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몽환적인 숲에서

by 훈 작가 2024. 10. 17.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안개가 낀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새벽길을 달려왔는데, 휑하니 쓸쓸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허탈한 마음으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축 처진 내 모습이 안 되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소나무들이 측은하게 날 나를 보는 듯합니다. 녀석들이 웬일이지 하는 표정들 같았습니다. 안개 낀 날이 아닌데 왜 왔지.

 

식당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일 줄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곳 소나무들은 그 정도는 될 겁니다.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사진 애호가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보은군 탄부면 임한리에 있는 솔밭은 익히 그렇게 알려진 곳이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왜 안개 낀 날만 유독 이곳을 찾는지.

 

다시 왔습니다. 안개 낀 솔숲은 다릅니다. 뻔한 숲이 아닙니다. 글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아는 최상의 언어를 동원하여 묘사한다면 이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뻔하던 숲이 더할 나위 없이 몽환적인 분위기로 변합니다. 마냥 보고 있으면 그윽함에 취합니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흐릿함이 연출하는 불투명함, 그 막막함의 깊이, 고독과 함께 한없이 젖게 들게 합니다. 아마도 여길 찾는 사진 애호가들은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호함을 연출한 안개가 의외로 아름답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화려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니까요.

 

내가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안개는 늘 불청객이었으니까요. 특히, 출퇴근 길에 만나던 안개는 날 긴장시켰거든요. 행여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요. 그랬던 내가 안개 낀 날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이게 다 사진을 배운 탓이기도 합니다. 사진이 아니었으면 전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솔숲에 운치 있게 안개가 깔렸습니다. 새벽길을 달려온 사진 애호가들이 숲에 가득합니다. 그들이 온 이유도 나와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안개가 만든 솔숲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고자 온 겁니다. 오늘 아침 안개 낀 솔숲을 본다면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솔바람이 스칩니다. 그윽한 솔향기가 힐-링인 것은 덤입니다. 해뜨기 전 싱그러움을 품은 공기는 청량함 그 자체입니다. 숲의 소리는 침묵이고, 숲의 언어는 고독입니다. 적막감이 어느새 고독 속으로 날 초대합니다. 삶은 웃고 울고, 사랑과 미움을 반복하며 때론 분노하게 하고 때론 슬프게 하지만, 숲은 이 모두를 안아주는 힐-링입니다.

 

솔숲은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의 아파트 같은 군상(群像)과 다릅니다. 모든 걸 품에 안습니다. 햇살, 바람, , 풀 향기. 밤하늘의 별빛까지 앙금이 쌓이지 않도록 말이죠. 심지어 인간의 외로움까지요. 여기에 안개까지 낀 날이면 모두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니까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불청객이었던 안개, 지금은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몽환적인 솔숲에서 안개가 사라지기 전까지 나는 꿈을 꿉니다. 동시에 안개를 통해 배웁니다. 때론 넉넉한 마음으로 남의 허물을 욕하지 않고 감싸주며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뉘우치고 바뀌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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