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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서유럽

융프라우

by 훈 작가 2023. 3. 19.

스위스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롤렉스(Rolex)나 오메가(Omega) 같은 명품 시계가 떠오르면 감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떠오른다고 한다면 너무 유치하다고 놀림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알프스를 떠올리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틀간 파리 일정을 뒤로하고 어젯밤 인터라켄(Interlaken)에 도착했다. 알프스의 아이거, 융프라우, 맨휘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는 스위스 중부 베른주의 작은 도시다. 인터라켄은 ‘호수와 호수 사이’라는 뜻으로 툰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있다. 알프스의 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스위스에 왔다는 것도, 알프스의 산자락에 와 있다는 사실도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설렘이 없었다는 얘기다. 저녁을 먹고 호텔을 나왔을 때도 거리의 상가는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꼭두새벽에 조식을 빵으로 해결하고 호텔을 나왔다. 

밖은 어두웠다. 인터라켄 동역(Interlaken Ost)에 도착하니 새벽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역 분위기는 썰렁했다. 융프라우로 가는 산악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은 우리 일행뿐이다. 열차를 기다리며 융프라우 산악열차 운행이 표시된 안내도를 카메라에 담았다. 새벽 6시 35분 인터라켄 동역에서 그린델발트(Grindelwald)로 올라가는 첫 차가 열차 홈에서 출발했다. 인터라켄 동역(Interlaken Ost)은 해발 567m이고 그린델발트는 해발 1,034m이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오전 7시 9분에 그린델발트역에 도착했다. 약 35분 정도 걸린 셈이다. 

열차에서 내렸다.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린델발트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클라이네 샤이덱은 해발 2,061m나 된다. 아직도 옅은 어둠이 남아 있다. 하늘은 맑은데 생각보다 춥지 않은 느낌이다. 찬 기운이 알프스에 온 느낌을 조금씩 실감이 나게 해 준다. 오전 7시 17분 클라이네 샤이덱로 올라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고 알프스산맥이 잠옷을 벗으며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산악열차는 알프스의 하얀 허리선에 꼭 껴안고 비스듬하게 누워 기어 올라간다. 그렇게 더듬으며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7시 50분이다.

다시 열차에서 내렸다. 마지막 융프라우 요호로 올라가는 열차가 오전 8시에 출발했다. 열차가 클라이네 샤이덱 역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터널로 들어갔다. 요란한 진동음만 객실의 정적을 깬다. 융프라우 요호 역은 해발 3,454m 높이에 있다. 클라이네 샤이덱과 융프라우 요흐 표고 차는 1,413m나 된다.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서 융프라우 요흐 역으로 올라가는 처음 2.2km 구간에서 2,320m 높이의 아이거 글레처까지 완만하게 올라가다가 터널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머지 지하터널 구간 7.1km는 아이거(Eiger)와 맨휘(Maenhwi)의 암벽 터널 속을 지난다. 이 구간이야말로 융프라우 산악철도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구간이다.

해발 2,016m 지점에 있는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서 융프라우 요흐 역으로 올라가는 열차는 톱니바퀴 레일 위를 달리는 특수 열차다. 이 톱니바퀴 열차는 14년에 걸쳐 아이거 북벽과 맨휘를 관통하는 암벽 터널을 뚫는 어려운 공사로 1912년 완공되었다.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에서 융프라우 요호(JungFrauJoch)까지 오르는 데 무려 52분이나 걸렸고, 인터라켄 동역(Interlaken Ost)을 출발한 지 2시간 27분 만인 오전 8시 52분에 있는 융프라우 요호 역에 도착했다. 역은 터널 안이다. 열차에서 내려 통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니 동굴이다. 동굴 안에는 관광안내소, 응급구호소, 기념품 가게, 우체국, 식당 등이 있다. 만년설로 이루어진 얼음 궁전을 관람한 후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 표면은 만년설이다. 여기가 플래토(Plateau: 3,573m)다. 고원지대로 향하는 관측소 쪽에 스위스 깃발이 펄럭인다. 웅장한 융프라우 3대 봉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최고봉인 융프라우의 높이는 4,158m로 맨휘(4,107m), 아이거(3,970m) 보다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처녀’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융프라우(Jung Frau)는 구름에 만년설로 덮인 모습을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 말로는 보고 안 보고는 운이란다. 실제 이곳에 올라가도 못 보고 가는 여행객들이 많다고 한다.

알프스의 처녀인 융프라우가 함부로 자신의 속살을 보여 준다면 신비감이 떨어질 것이다. 융프라우가 ‘신이 빚어낸 알프스의 보석’이라는 칭송을 받는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다. 보기 힘들다고 하니 더 매혹적으로 보인다. 못 볼 줄 알았던 융프라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짓말처럼 맑은 12월의 하늘이 손이 시리도록 차가우면서도 맑고 청명하다. 그 하늘을 배경으로 처녀의 하얀 속살처럼 융프라우의 봉우리가 드러났다. 심장이 뛴다. 스핑크스 테라스에서 알레치 빙하(Aletsch Gletcher)가 보였다. 빙하는 융프라우 아래 남쪽으로 길게 24km 뻗은 만년설로 이루어진 거대한 얼음 강이다. 1천만 년 전에 형성된 알레치 빙하는 현재 원래 넓이의 1/3로 줄어들었고, 지구 온난화에 따라 점점 그 크기가 줄어들고 있어 100년 뒤에는 사라질 것이라 한다. 

파리 야경은 야속한 겨울비 때문에 아쉬움을 남겼다. 알프스의 융프라우마저 만나지 못했더라면 정말 우울할 뻔했다. 세상은 웃음 뒤에는 눈물이 있을 수 있고, 눈물 뒤에는 웃음이 있을 수 있다. 희비가 교차하는 일은 여행이나 삶이나 언제든지 있는 일이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는 변하고, 그 변화 속에 사라지고 묻히는 것은 세월이다. 오늘은 2012년 12월 31일이다. 또 한 해가 묻힌다. 내일은 미래다. 미래의 시간은 또 다른 여행이다. 삶은 끊임없이 과거로 묻히는 여행이다. 내일은 우리가 만나야 할 여행의 목적지다. 인생은 여행이다.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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