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생은 여행이다/서유럽

교황청 근위병

by 훈 작가 2023. 3. 27.

 

제복은 소속감과 일체감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과거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던 사회에서는 옷에 따라 구분이 되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획일화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제복을 입은 대상이 부럽거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적도 있다. 학창 시절 특정한 행사가 있는 날 보이스카우트 제복을 한 친구들의 모습이 그랬고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하는 사관생도의 보습이 그랬다. 사관생도의 제복이 멋져 보여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제복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성 베드로 성당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데 멋진 제복을 한 근위병이 보였다. 내가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자 가이드가 근위병에 대한 설명을 했다.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병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란다. 바티칸을 지키고 경비업무를 맡고 있는 근위병들 모두 스위스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란다.   스위스 근위병들이 왜 이곳에 경비를 서는지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스위스가 지금은 알프스 산맥을 끼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부자나라다. 그러나 과거에는 평야보다 산지가 많은 척박한 환경에 마땅한 수입원이 없어 오늘날처럼 풍요롭게 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스위스의 유일한 돈벌이가 수단이 유럽대륙에 용맹을 떨친 용병들이었다고 한다. 스위스의 용병들은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면서 공사기간 동안의 경호를 스위스 취리히, 루체른 주와 계약을 맺고 150명이 파견된 것이 교황청 용병의 시작이었다.  당시에 스위스 용병의 명성은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칠 정도로 대단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 후 1527년 부르군디(현재의 네덜란드)의 찰스 5세라는 왕이 로마를 침략하는 대량 약탈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용병대장 카스퍼 로이스트를 포함하여 147명의 용병이 죽고 47명만이 살아남았다. 교황청을 지키는 용병이 전멸 직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를 끝까지 지켜내어 충성심을 인정받는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의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맡게 되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한다.  프랑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파리 시민 혁명군에 포위되었을 때 베르사유 궁전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프랑스 군대가 아니었다. 궁전을 지키는 근위대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 700여 명은 끝까지 왕과 왕비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열 하게 전사했다. 

혁명군이 퇴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스위스 용병은 계약 기간이 수개월 남았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전사한 용병이 가족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은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젊은 용병들이 목숨을 바치며 송금한 돈은 헛되지 않았다. 스위스 용병의 신화는 다시 스위스 은행의 신화로 이어졌다. 용병들이 송금했던 피 묻은 돈을 관리하는 스위스 은행의 금고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스위스 은행은 안전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스위스 용병이 로마 교황의 경비를 담당하는 전통이 이어지는 데에는 신용이 배경이 되었고 이러한 바탕에 스위스 은행은 세계적으로 신용의 대명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스위스 은행 그 반대로 돈을 받으며 보관해 준다.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병이 되려면 국적이 스위스 사람으로 기독교 신자이어야 한다. 언어는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정도는 가능해야 하고, 신장은 174cm 이상에  나이는 19~30세로 용모 단정한 남자여야 한다. 월 보수는 숙식제공에 1,000달러 정도라고 하며 근위대 구성은 장교 5명 사병 101명이라 알려져 있다. 

근위병 제복이 너무 멋져 보인 다고 했더니 가이드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멋져 보이더라! 미켈란젤로가 지닌 예술적 재능의 한계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뿐이다.  

'인생은 여행이다 > 서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콜로세움을 지은 이유  (2) 2023.07.07
아는 만큼 보이는 “몽마르트르”  (2) 2023.06.17
융프라우  (0) 2023.03.19
미켈란젤로 언덕  (0) 2023.03.10
파리의 상징 에펠탑  (0) 2023.02.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