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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개밥바라기

by 훈 작가 2025. 1. 2.

어렸을 때 본 별은 아름다웠습니다. 신비로움이 가득했죠. 상상력은 내게 꿈을 자극했고, 나는 밤마다 어린 왕자가 되어 소행성 B612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때 별은 과학이 아니라 동화 속에 머물렀습니다. 순수했던 내 영혼과 밤하늘의 별은 꿈속을 누비는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인 걸 알게 되면서 별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환상이였습니다. 어른이 되어 순수함이 지워지기 탓일 겁니다. 과학은 논리와 이성(理性)을 깨닫게 해 주었고, 나는 그때부터 별을 과학속에 우주라는 이름으로 만나야 했습니다. 그 이후 가슴속에서 있던 별들이 사라졌습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죠. 별들을. 그때 덩달아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 찧던 옥토끼까지 하얀 쪽배를 타고 은하수 건너편으로 가버렸습니다. 대신 이태백이 놀던 달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죠. 문학이 뭔지, 낭만이 뭔지도 모르면서 얄팍하기 짝이 없는 지식 몇 줄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청춘을 보냈습니다.
 
어쩌다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았습니다. 그 별이 뭔지 몰랐죠. 나중에 알았습니다. 샛별이란 이름의 금성이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개밥바리기' 사연. 배고픈 개가 저녁밥을 달라고 짖을 무렵, 서쪽 하늘에 뜨는 별이라서 붙인 이름이거든요.

아! 번뜩이는 조상들의 언어 감각에 감탄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홀연 어린 시절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초저녁이면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러웠죠. 빈 개밥그릇을 핥으며 밥을 달라 꼬리 치던 우리 집 바둑이. 녀석의 밥그릇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혀로 얼마나 핥았으면 그렇게 되었을까.
 
바라기는 우리말로 음식을 담는 사기그릇을 뜻합니다. 그러니 개밥바라기는 개 밥그릇입니다. 해가 지고 서쪽 하늘이 어둑해 질 무렵 유난히 빛나는 별입니다. 샛별(금성)의 또 다른 이름이 개밥바라기인 이유가 여기서 생겼다고 합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니 개도 배가 고팠겠죠. 반려견? 그땐 없던 말입니다.

갑진년 마지막 날, 해넘이 사진을 찍으러 나왔습니다. 요즘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날씨마저 쌀쌀합니다. 사진 촬영이 만만치 않습니다. 손이 너무 시리거든요. 해가 넘어간 후 구름 한 점 없는 초저녁 하늘을 보았습니다. 무척 맑더군요. 때마침 홀로 외로이 떠 있는 별 하나가 보였습니다. 맞습니다. 샛별(금성)입니다. 녀석을 한참 보았습니다. 그때 그 별이었습니다.
 
바둑이를 하늘로 보냈지 60년이 훌쩍 넘었는데, 별은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네요. 그땐 저 별이 왜 개밥바라기였는지 몰랐습니다. 어른이 되고나서 알았죠. 그러고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초롱초롱했던 바둑이 눈망울처럼 오늘도 샛별은 반짝입니다. 샛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바둑이가 짖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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