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겨울 나그네

by 훈 작가 2025. 1. 7.

어릴 적 구름을 타고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고향 마을 산 능선에 걸쳐진 구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구름 위로 뛰면 된다고 생각했죠. 떨어져 다칠 염려도 없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왜냐하면 구름이 이불 솜처럼 생겼으니까.
 
상상력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과학을 배우면서 깨달았으니까요. 하지만,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하잖아요. 구름에 대한 환상이 식어갈 무렵 비행기를 타게 되었죠. 어릴 적 매료되었던 구름은 부산 출장길에 비행기를 타고서야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환상이 깨지긴 했어도 비행기에서 본 여운은 오래 남았습니다. 하얀 양 떼 목장 같은 구름이 그림 같았거든요. 이후로도 여행길에 구름을 많이 만났죠. 기내 창 덮개를 열고 본 구름바다는 어린 시절 같지는 않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기에 매혹적이었습니다. 남극의 설원처럼 내 눈을 빨아들였죠. 눈밭에 누워 뒹글고 싶을 정도로.
 
구름을 보면 연상되는 단어있습니다.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란 말이 정겹기는 하지만 요즘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듯 보입니다. 문학적인 수사로 멋지게 보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집도 없고, 갈 데도 없는 사람처럼 보여 측은한 느낌이 들거든요. 차가운 겨울 하늘에 구름 한 점을 보면서 홀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생각났기 때문이죠.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시다시피 슈베르트는 실연을 당했잖아요. 약혼했던 여성이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을 택하면서 청년 슈베르트에게 파혼을 선언합니다. 이에 충격받은 슈베르트는 밤에 그녀의 집을 찾아가 문에 작별 인사의 쪽지를 남기고 도시를 떠나 한겨울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노래합니다. 그게 유명한 겨울 나그네입니다.
 
그는 평생 가난과 외로움 속에 살았습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무척 존경하였습니다. 베토벤은 음악가로 성공하여 부와 명성을 누리며 살았지만, 슈베르트는 재능을 인정받지 못해 평생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음식을 살 때 밤에 떨이로 파는 음식을 사서 먹을 정도였습니다.

1827년,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31세였죠. 슈베르트는 생전에 자신이 작곡한 겨울 나그네가 연주되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겨울 나그네의 원제목은 Winterreise(겨울 여행)입니다. 그런데 제목과 달리 왜 겨울 나그네라 했을까요.
 
영어로 ‘Traveller’는 '여행자'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선 ‘나그네’라고 번역하는 게 더 문학적 느낌이 짙게 묻어나는 감성적인 단어가 봅니다. 여행은 본래 목적지와 일정이 있습니다. 지도를 갖고 목적지를 향해 자유롭고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행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실연의 아픔 때문에 겨울 여행자가 된 슈베르트, 그는 사랑이란 목적지를 잃은 여행자입니다. 갈 곳이 없죠. 그러니 나그네처럼 겨울 여행을 떠났을 겁니다. 마치 파란 하늘의 구름 한 점처럼 정처 없이. 거실 창밖을 보니, 구름 한 점이 보입니다. 보고 있노라니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생각납니다. 외롭고 쓸쓸하게 보이는 겨울 나그네 같네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제목만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솔직히 말하면 낭만적이고 멋진 표현 아닌가요. 그런데 슈베르트의 슬픈 사랑과 어려웠던 삶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슬퍼도 너무 슬픈 한 음악가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까요. ‘겨울 나그네’라는 표현,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이 미어집니다. 

'Photo 에세이 > 감성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맞은 아침  (34) 2025.01.09
내가 정말 꽃일까.  (30) 2025.01.08
개밥바라기  (70) 2025.01.02
겨울아, 너 이상해.  (60) 2024.12.25
1년 뒤 기대하는 내 모습은?  (102) 2024.12.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