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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밟히고 또 밟히며 지냅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날 그렇게 밟고 다닙니다. 그들이 길이라고 정의하면 어디든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내 운명이고 삶입니다. 자연의 생명력을 임의대로 빼앗아 그들의 영역으로 편입해 길이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그 순간부터 난 그들의 영토가 되어 버립니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걸 잃어버린 채 그들의 일상에 종속되어 길이란 정체성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들이 길이라 부르지만 내 이름은 천차만별입니다. 오솔길, 가로수길, 지름길, 골목길, 논두렁길, 샛길 코스모스길, 둘레길, 아스팔트 길, 산책길, 공원길, 학교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겨울 손님이 찾아오는 날에는 사람들이 나를 눈길이라 부릅니다. 단지 내게 손님일 뿐인데 그의 이름을 갖다 붙여 그렇게 부릅니다. 얼떨결에 손님 덕분에 난 모든 길의 주인 대접을 받습니다. 과분합니다. 졸지에 모든 길을 천하 통일하듯 눈길이라 하니까요. 한편으론 이름을 빼앗은 것 같아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를 부러워도 하고, 고마워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런지.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날 많이 무서워하고 경계한다고. 왜냐하면 눈길이 미끄러워 사람들에게 덜 시달린다는 거죠. 눈길이 미끄러워 사람들이 안 나오니까, 다른 때 보다 밟힐 일이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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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듣던 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날 많이 기다렸다는 겁니다. 시달림을 넘어 쉴 틈이 없다는 겁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에 시달려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 초등학생처럼 겨울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나마 내가 와야 만신창이가 된 몸을 쉴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 때문에 친구들이 이름을 빼앗겼다고 날 원망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오랫동안 눈길로 남아있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난 잠시 왔다 가는 여행자일 뿐인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안타까웠습니다. 내가 눈길로 더 오래 있어 주길 바란다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름을 빼앗은 불청객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로 했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날 싫어했습니다. 아니 원성이 높았습니다. 마음대로 다닐 수 없다며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도 한걱정합니다. 행여 눈길에 넘어져 다칠까, 걱정스러운 겁니다.
반면, 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와 눈길을 걸으며 정담을 나눌 수 있어 좋고, 고즈넉한 눈길을 혼자서 조용히 걸으며 겨울 정취에 흠뻑 젖어 좋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편함보다 오히려 감성적이고 낭만적이라 좋다고 합니다. 똑같은 길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눈 쌓인 겨울길. 불편함을 채우고 걸으면 짜증납니다. 넉넉함으로 다가가면 다릅니다. 얼마든지 행복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감성을 채우고 걸으면 힐-링의 길이 되고, 시인의 마음로 다가가면 시적 영감을 자극하는 사색의 길이 됩니다. 세상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어차피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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