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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남유럽

반 고흐의 <아를 병원의 정원>

by 훈 작가 2023. 6. 22.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회색 건물에 <Espace Van Gogh>라고 불어로 쓰인 게 보였다. 에스파스는 불어로 ‘장소’라는 뜻이다. 반 고흐가 발작을 일으켜 입원해 있었던 정신병원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늑한 정원이다. 가운데 정원은 반 고흐의 정원이라고 불리는데 연못과 아담한 화단이 있다. 고흐가 머물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고흐의 작품 <아를 병원의 정원>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그가 이 병원의 정원을 그린 작품이다. 병원의 복도가 아치형인데 작품 속 그림도 노란색으로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표지판에서 차례로 사진을 담았다. 지금은 ‘고흐’를 주제로 한 종합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으며, 도서관. 영상자료관, 번역학교, 전시관 등이 함께 있다.

인솔자는 말했다. 고흐는 1888년 12월에 귀를 자른 사건을 저지른 이후 1889년 5월까지 아를의 병원에서 지내며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아를 병원의 정원〉은 그 당시의 절망감을 달래며 그린 작품이다. 가운데 있는 정원에는 분수가 있고, 여덟 개의 구역으로 나뉜 꽃밭에 다양한 꽃이 피어 있다. 

아치형 통로가 있고 흰 석회 칠을 한 건물로 오렌지 나무가 있다. 그림은 2층 병실 복도에서 내려다보며 그린 것 같다. 그림 속의 병원 외벽과 기둥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노란색이다. 당시는 병원의 외벽이 노랗게 칠해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아를 병원의 정원〉의 그림과 비슷하게 칠해져 있다.

그가 왜 정신병원에 오게 되었을까? 인솔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반 고흐는 아를에 꽂혔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게 화가들의 공동체였는데 그걸 구성해 이곳에서 같이 지내는 것을 꿈꿨다고 한다. 그는 화가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편지를 써 보냈는데, 대부분 그의 제안에 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폴 고갱이다. 1888년 10월 그가 아를에 도착하여 고흐와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나 두 천재 화가는 성격과 그림에 대한 관점이 달라 애당초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한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걸 좋아했고, <고갱>은 창의적인 그림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결국 고갱이 온 지 두 달이 지날 무렵인 12월 23일에 심하게 다툰 후 고흐는 심리적 흥분상태에서 정신발작을 일으켜 면도칼로 자기 귀를 잘라 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건 직후 고흐는 평소 알고 지내던 Rachel(매춘부)을 찾아가 자른 귀를 건네주었고, 놀란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기에 이른다. 당시 이 사건은 지역신문에도 보도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동생 테오가 고갱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형을 찾았다. 

고흐는 1889년 1월 퇴원했으나 환각과 망상으로 병원과 집을 번갈아 다녀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 고흐를 정신병자라고 부르면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한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다른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부탁해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생폴 요양원을 추천받아 1889년 5월 8일, 아를을 떠나 생 레미로 가게 되는데, 1년 후, 다시 그곳을 떠나 파리 근교 오베르 쉬 와즈(Auvers-sur-Oise)로 갔다. 

그러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1890년 7월 27일, 37세의 나이로 들판으로 나가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죽지 않고 머물던 여관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의사를 불렀으나 결국 그는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통은 영원하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를에서 불과 15개월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무려 200여 점의 주옥같은 대표작들을 대부분 이곳에서 그렸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반 고흐는 경력 10여 년에 불과한 화가였다. 게다가 37세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하지만 그는 불멸의 작가로 기억된다. 그가 마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증명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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