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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23)

by 훈 작가 2023. 8. 16.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자존심

  John Edward는 시차 적응할 겨를 없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강남 삼성병원에 들러 Susan과 Anna의 상황을 살폈다. 오후에는 대사관에서 Anna와 관련된 내용을 보고받았다. 어제는 Anna의 변호인을 만나 Anna 관련 내용을 경청했다. 그가 유럽 출장을 취소하고 서울에 와 이틀 연속 강행군했다.
  오랜만에 잠을 깊이 잤다. 그간 피로가 다소 해소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은 복잡해도 몸은 한결 가벼웠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을 잡지 않았다. Anna 문제를 차분하게 정리해 보고 싶었다. 일이란 서두를수록 핵심을 놓칠 우려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를 비운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딸의 문제는 공정하지 않다. 사건에 권력이 개입된 이상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현실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게 대한민국이라면 결과는 뻔하다. 그렇다고 뒷짐 지고 있을 수만도 없다. 아빠라고 무작정 딸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도 고민스럽다. 어떤 행동이 현명한 것인가. 
  John과 Susan은 헬리콥터 부모가 아니다. Anna를 간섭하며 키우지 않았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했다. 그리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내 자식이라도 이제는 Anna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 그게 두 사람의 인식이다.
  John은 Anna 문제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는 딸의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안다. 개입하고 싶은데 녀석과 불필요한 갈등이 있을까 걱정되었다. 서울에 오긴 했지만, 상황이 간단치가 않다. 하는 수 없이 John은 어제 밤늦게 아내에게 Anna 문제를 의논해 보자고 전화했다. 

  Susan은 대사관저로 오며 생각했다.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미안한 것은 아내로서 남편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이다. 남편은 이에 대해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만 같아 남편 얼굴 보기가 편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이 딸의 문제를 상의해 보자고 한다. 
  사고 직 후 Anna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겁이 났다.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다쳤어야 하는 데 반대였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자신의 운명이 왜 이런지 원망스러웠다. 그때 남편의 존재가 더없이 크게 느껴졌다. 스스로 감당하기에 그녀는 너무 작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알려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망설였다는 것은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얘기다. 그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전화했다. 남편은 한 치 망설임 없이 서울로 날아왔다. Susan은 대사관저로 오는 차 안에서 그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남편은 Anna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대응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는다. 남편은 공직자로 공인(公人)의 길이 있고, 사인(私人)의 길도 있다. 남편은 공사구별이 뚜렷한 사람이다. 자기 핏줄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딸의 아버지로서 이 문제를 개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딸의 성격을 아는지라 심사숙고 중일 것이다. 

  Susan이 대사관저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대사관저 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부부는 잠시 정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 아침은?”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 스티브가 일부러 나와 같이 식사하려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같이 먹었지.”
“연일 강행군 하시느라 매우 피곤하실 텐데….”
“그래서 오늘 하루를 비워두었어, 당신과 시간 좀 같이하려고.” 

"..."
“Anna는 좀 어때?”
“생각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그럼, 회복이 빠르다는 얘기군 그래. 다행이야. 여보! 안으로 들어가지.”
“그럴까요.” 
  Susan이 남편에게 커피 한잔할 것인지 물었다. John이 같이 마시자고 대답했다. 그녀가 커피 두 잔을 갖고 소파로 가져왔다. 모처럼 부부가 오붓하게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John이 Susan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Anna는 약한 녀석이 아니야, 당신과 내가 믿어야 해.”
Susan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John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Anna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괴리감이야.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현명한 판단을 못 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 남들이 보기엔 무모한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
“당신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거야 내가 나서면 Anna가 싫어할 게 뻔하지.”
“맞아요. 그야 안 봐도 비디오예요.”
“그래서 말인데, 김 변호사 말처럼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
“그럼, Anna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대통령과 면담을 추진하려고요?”
“맞아, 당신 생각은 어때?”
“나중에라도 Anna가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고.”
“어쨌든 저도 사과만 받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라 생각해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생각대로 된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Susan은 면담이 성사된다고 해도 전임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남편이 뭔가 해결하려고 나서는 모습이 정말 고마웠다. 
“여보!,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John 의원이 휴대전화를 들고일어나서 관저 접견실로 들어갔다.
“스티브! 나야 John.”
“오, 그래.”
“다름 아니고, 청와대 면담 좀 추진해 줄 수 있겠나?”
“어려울 거 없지.”
“언제가 좋겠나?”
“오늘이 화요일이니 가능한 한 이번 주 안에 시간을 냈으면 좋겠네.”
“알았네, 청와대에 연락해서 면담 일정을 잡아보도록 하지.”
“고맙네.”

John이 통화를 끝내고 나와 Susan에게 물었다. 
“직원들이 Anna는 잘 경호하고 있지?”
“잘하고 있어요. 그나저나 당신한테 정말 미안해요. 바쁘실 텐데 오시라고 해서… 당신 일이 차질 없었으면 좋겠어요.”
“일부는 취소했고 주요 일정은 연기시켜 놓았으니 당신이 걱정 안 해도 돼. 어쨌거나 이왕 서울에 왔으니 당분간 Anna 문제에 집중해야지. CIA 한국 지부장 말로는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거야. 한국 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좀 시끄러워질 가능성도 크고. 뭐든지 정치나 권력이 관련되면 일은 꼬이게 마련이거든.”
“그렇지 않아도 당신 머리가 아플 텐데 전 당신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어요.”
“여보!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당신하고 단둘이 데이트나 했으면 싶은데 머리도 식힐 겸 해서, 당신 생각은 어때?
“알았어요. 제가 시간 봐서 당신이 마음에 들 만한 곳을 찾아볼게요.”
“그나저나 Anna는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 거지?
“의사 말로는 늦어도 10일 이내는 가능할 거래요.”
“빨리 퇴원해야지. 병실 안에만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

“안녕하십니까? 비서실장님! 국사를 챙기시랴 매우 바쁘시죠?”
“청와대 일이 항상 그렇지요. 대사님!”
“바쁘실 테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그러시죠.”
“다름 아니라 미 하원 외교위원장님이 서울에 오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위원장님께서 대통령님 한번 뵙고 싶어 하는데요.”
“특별한 현안이나 의제라도 있으신지요?”
“한·미 동맹국 간에 꼭 현안이 있어야 합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사님! 공식적으로 외교부에서 보고받은 게 없었는데, 갑자기 면담을 말씀하시니 당황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저도 공식적인 면담이라면 저도 외교부를 통해서 연락드렸을 겁니다.”
“그럼, 비공식인 면담을 원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면담 일정은 언제였으면 좋겠습니까?”
“이번 주 내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께 보고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 일정표를 살려 보았다. 일정 조정이 여의찮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갔다. 어차피 대통령이 직접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 비서실장은 집무실로 걸어가면서 어젯밤 회의에서 거론된 Anna 양 사건이 자꾸만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비서실장이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가 숨을 고른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집무실 문을 두 번 두드린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에서 국정 현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대통령이 회의용 탁자 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서실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John Edward 의원이 금주 안에 면담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올 게 왔군요.”
대통령이 비서실장이 내민 일정표를 살펴보았다.
“어느 거 하나 빼기가 그렇군요.”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방문,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회담, 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 오찬, 중국 저장성 당서기 면담 …. 아무래도 이번 주는 숨 쉴 여유조차 없는 일정이어서 어렵겠네요. 면담 일정을 다음 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번 주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요. 비서실장이 다시 한번 협의해 보시죠.”
“제가 협의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저쪽에서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우리 사정을 모르고 홀대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우리가 일부러 안 만나는 건 아니잖습니까? 우리 일정을 생각해서 만나자는 건데 그런 걸로 자존심이 상한다면 대통령인 나로서는 별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는 상대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대한민국 외교의 중심축인 미국 고위급 인사라 마음이 걸렸다. 웬만하면 대통령이 일정을 조정해서 면담 요청을 받아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의중으로 보아 면담은 이미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그럼, 스티브 대사와 다시 협의해 보고 유선으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비서실장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미 관계를 고려해 대국적인 견지에서 대통령이 한 발짝 물러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가 다시 비서동 건물까지 먼 거리를 또 걸어가야 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돋았다. 이제는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아직 그게 잘되지 않았다. 왜 이리 마음을 다스리는 게 어려울까.
  
  스티브 대사가 청와대로부터 연락받았다. 대통령 일정을 이유로 이번 주는 면담이 힘들다고 통보였다. 스티브 대사는 내심 불쾌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청와대가 거절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John! 나야, 스티브!”
“잠깐만 스티브.”
John Edward가 일어나 접견실로 들어갔다.
“그래, 어떻게 됐나?”
“이번 주는 어렵다는 거야?”
“아하! 그래. 청와대가 날 홀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렇군. 스티브!”
“정권 초기니 그럴 만도 하지. 아마 세상을 다 얻은 그런 기분일 테니까.”
“알았네. 스티브!”
“John! 자네 속상할까 봐 염려되네.”
“청와대가 그렇게 나오면 내 방식대로 하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John!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나.” 
“수고했네. 스티브!”

  John Edward는 청와대가 전임 대통령을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면담을 거절한 것이라 받아들였다. 거기에 청와대가 Anna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홀대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접견실에서 통화를 끝내고 거실로 나온 John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아내에게 별일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여보! 와인 좋아하지?” 
“말 하나 마냐 죠. 명색이 캘리포니아 최대 와인농장 맏며느리인데.”
“와인 한잔하고 싶은데 어디 좋은 데 없어?” 
“당신 마음에 들지 모르겠는데, 내가 묵고 있던 호텔 라운지도 분위기 괜찮은데, 가 보실래요?”
“그럼, 거기라도 가 볼까?”
“저야 당신이 좋다면 상관없어요.” 
“그럼 가 봅시다.”
“제가 예약해 놓을게요.”
  Susan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눈치챘다. 여자 특유의 육감이다. 남편은 자존심이 강한 데다 너무 순진한 사람이다. 좋게 보면 곧은 사람이고, 달리 보면 융통성이 부족한 성격의 소유자다. Susan은 남편이 접견실에서 나오는 순간 그가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럴 때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심장에 회오리치는 폭풍을 따뜻하게 안아 잠재워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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