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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에세이

시계가 죽었네

by 훈 작가 2023. 2. 28.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시계가 죽었네.”
   아내의 말에 벽시계를 보았다. 그네 타듯 움직여야 할 시계추가 제자리에 서있다. 멈춘 지 2시간 이상 되었다. 얼른 새 건전지로 교체하고 시침을 돌려 시간을 맞추었다. 다시 시계를 벽에 걸고 시계 몸통을 좌우로 흔들어 시계추가 다시 움직이게 한 다음 수평을 바로 잡았다. 죽었던 시계가 다시 살아 숨을 쉬기 시작한다. 
   얼마쯤 지난 뒤 아내가 다시 말했다. 
“시계가 가지 않는 것 같아.”
   또 시계추가 움직이지 않는다. 건전지가 이상 있다 싶어 다른 건전지로 바꾸어 넣고 다시 벽에 걸고 시계추가 움직이도록 했다. 심정지 상태 같았던 시계가 정상적인 소리를 내며 다시 그네를 타듯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한다. 혹시나 하고 잠시 동안 시계추를 보았다.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혹시나 해서 몇 분 뒤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시계추는 제대로 움직이는데 시곗바늘은 그대로다. 마치 뇌사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심장은 뛰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 것 같다. 답답한 마음으로 녀석을 바라본다. 왜 이러지? 알 수 없다. 시곗바늘이 꼼짝달싹하지 않는 벽시계를 보고 있노라니 묘한 생각이 스친다.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던 거실분위기가 적막하다. 왜 이런 느낌이 엄습하는 걸까. 단지 시곗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것뿐인데. 벽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사실 시계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었다고 말한다. 사람도 아닌 시계를 죽었다고 하니 홀연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게 보면 시계의 기능을 하지 못할 뿐인데. 그런데 우리는 죽었다는 표현을 쓰는 갈 거다. 그 말은 곧 시간이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관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일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시계를 살아 있는 생명체 대하듯 죽었다는 표현을 하는 걸까. 우선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알지 못하면 답답하다. 그 속에는 불안심리도 있다. 정해진 시간 속에 움직이고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가득한데 언제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생활의 질서가 무너지는 셈이다.  어쩌면 시간이란 틀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증이다.  
   시간이란 관념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인간이 시계라는 것을 발명한 후 시간이란 관념이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왔음이 분명하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시간의 여행자로 살기 시작했고, 영원히 시간에 종속되어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 스스로 정의한 개념 속에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아이러니하다. 시계라는 요물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간에게 시간이란 관념에 얽매어 살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연현상에서 깨닫고 찾아낸 시간이란 관념을 시계라는 물건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역사를 정의하고, 그 속에서 세월과 동행하며 개인의 인생사와 역사를 그려가며 산다. 
   인간 스스로 부여한 시간이란 관념 속에는 생명이 담겨있다. 생명은 시간으로 정의된 수명을 지닌다. 생명을 지닌 존재만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시계는 인간의 정의한 생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계가 죽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시계가 멈추었다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우리는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거실이란 공간의 시간을 지배하는 시계가 죽으니 그 속에 있는 다른 것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멈춘 느낌이 든다. 거실 장, 소파, 창가 쪽 화분에 있는 꽃기린, 엔절램프, 스투키, 다육이, 오로라 에인절, 아데니움도 호흡을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내 마음속에 다가온다. 정중동(靜中動)의 공간에 동(動)은 없고 정(靜)만 남은 느낌이다.
   여전히 벽시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받은 시계추는 생기 넘치게 뛰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곗바늘은 무의식 상태다. 난 그런 벽시계를 응시하며 답답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해 헤매고 있는 녀석은 눈을 감은 채 의식불명 상태다.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거실 벽시계는 알게 모르게 동고동락하듯 우리 가족에게 시간의 관념을 알려주며 같이 살아왔다. 이런 녀석을 버려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 고민 아닌 고민이다. 우리 집 거실의 터줏대감으로 오랜 인연을 함께 해 온 정 때문이다. 그래도 녀석은 하루에 두 번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최소한의 존재감은 유지하고 있다. 
   “시계가 죽었다.” 는 언어의 유희 같은 표현에 잠시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사실 시계가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는 표현은 맞지 않다. 시계는 우리가 시간의 인식하기 위해 초대하여 모셔 놓은 공간이다. 그나마 예전에는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요즘은 예전만 못해 홀대받는 처지다. 아무래도 벽시계를 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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