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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여명(黎明)

by 훈 작가 2023. 9. 11.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밤입니다.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가는 시간, 나는 그 어둠 속에 와 있습니다. 대지는 고요하고, 하늘은 졸음에 겨운 별빛만 가끔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있습니다. 고요 속에 묻힌 시간은 숨결마저 잠들게 합니다. 이럴 때 침묵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어둠과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명을 만나려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야 합니다.

한때는 어둠이 무서웠습니다.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낸 귀신 이야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많은 시간 함께 밤을 같이 보냈는데 그땐 그랬습니다. 귀신을 만날까 봐 그랬던 겁니다. 그게 무서워 밖에 나가기 싫었습니다. 대신 밤이 나를 꿈나라로 이끌었습니다. 덕분에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사진을 배울 때 강사는 말했습니다. “빛의 미학”이라고. 가슴에 닿았습니다. 이후, 카메라와 친해지면서 깨달았습니다. 빛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언제인지를. 빛이 어둠과 사랑을 나눌 때였습니다. 그게 여명(黎明)이었습니다. 사랑은 짝이 있어야 하듯, 빛도 어둠이란 짝이 없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둠이 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아주 먼 우주에서 빛이 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빛은 어둠을 찾아옵니다. 짧은 만남인 걸 알면서도 어둠은 빛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만나는 그 시간이 여명입니다. 가장 행복한 시간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어둠은 빛을 가장 아름답게 해 주고 떠납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어둠은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둠의 사랑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빛이 사라지고 밤이 되면 어둠을 싫어해 숨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둠을 좋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긴 어둠 속에서 여명을 기다리는 저는 가슴이 뛰고, 설렙니다. 빛과 어둠의 사랑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황홀하기 때문입니다. 둘의 사랑이 끝나면 해가 나옵니다. 사랑의 결실인 거죠. 여명을 빛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 '여'는 어두울 여(黎)이고, '명'은 밝을 명(明)입니다. 어둠과 빛이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어둠이 떠나면서 내게 한마디 합니다.

“어둠이 존재하지 않으면, 빛도 아름다움도 존재하지 않아요.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 좇아요. 어둠을 싫어하며, 악마화하며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모두 난리죠. 그런데 정말 문제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른 척하죠. 제가 볼 때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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