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메밀꽃 필 무렵(1)

by 훈 작가 2023. 9. 20.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 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 조선달, 동이 이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장터로 가는 메밀꽃이 핀 달밤 풍경에 나오는 장면이다. 나는 ‘메밀꽃’ 하면 소설 속의 이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메밀꽃이 핀 달밤 풍경을 서정적으로 정말 아름답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소설의 백미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짙은 안갯속에 메밀꽃이 목화밭처럼 몽글몽글하다. 안개가 만든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마치 꿈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나 홀로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무대를 클릭해 본다. 소설 속 장면처럼 달밤은 아니지만, 메밀꽃이 장관인 것만은 사실이다. 달빛과 어우러진 풍경이라면 소설 속의 메밀밭과 다르지 않겠지 하며 생각에 잠겨본다.

사람의 정서를 움직이는 것이 무언인가 생각해 보면 미학(美學)이다. 글이 추구하는 미학은 문학이다. 글 속에 녹아든 아름다운 문장이 곧은 미학이다. 작품 속에는 미학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준다. 아름다운 글이나 아름다운 사진이나 모두 사람의 정서를 움직이는 미학(美學)이다. 장르만 다를 뿐이다. 
    
오늘 메밀꽃을 찾아 사진에 담고자 했던 이유가 있다. 앞에 인용한 소설 속의 메밀꽃 핀 장면을 좀 더 실감 나게 느껴보고 싶었다.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보지 않고서 고개만 끄덕이는 것은 왠지 부족하다. 꽃의 실체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게 어쩌면 위선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은 소심한 성격 탓 일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젠 알았다. 작품 속의 메밀꽃 핀 달밤 풍경이 지금껏 상상 속에 머물러있었다. 그나마 오늘은 상상 속의 그 장면이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직접 눈으로 보고 사진까지 담았으니 달빛 속에 그날 밤 그 장면을 그려 넣으면 보다 실감 날 것이 분명하다. 작품 속의 서정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Photo 에세이 > 감성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무곡  (4) 2023.10.18
별이 빛나던 밤에  (14) 2023.09.26
새벽 마중  (2) 2023.09.17
우주를 품은 꽃  (10) 2023.08.29
연인의 필수품  (4) 2023.08.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