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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가을 무곡

by 훈 작가 2023. 10. 18.

춤을 춥니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는데 어디선가 리듬을 타고 와 가을바람이 춤을 춥니다. 우리는 그 리듬의 선율과 춤의 향연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자연이 만든 무대는 우리가 만든 무대와 다릅니다. 가을 들녘이 그려내는 풍경은 바람과 빛이 조화를 이루는 넓은 들녘으로 나와야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롯이 가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공연입니다. 

춤은 오선지에 올려놓은 음표에 따라 박자와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홀로 추는 춤은 외로워 보여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만듭니다. 그래서 춤은 누군가와 같이 추어야 아름다워 보입니다. 과연 이 넓은 들녘에서 누가 바람과 함께 춤을 출 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일수록 애간장 녹이듯 시간은 더디게만 갑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무대 뒤로바람과 함께 춤을 출 주인공들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공연을 준비하려는 발레리나들처럼 보입니다. 리허설이 끝나자, 막이 오릅니다. 하루 끝머리에 걸려있는 태양이 만든 빛이 조명처럼 무대 위를 비추어 줍니다.

군무를 이룬 억새들이 발레리나가 되어 무대 위에 등장했습니다. 순간 하늘에서도 바람이 내려옵니다. 하얀 억새가 발레리나가 되어 팔을 벌려 바람을 맞이합니다. 가을 무곡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리듬에 맞춰 은빛 물결을 만든 발레리나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발을 세워 늘어서 춤을 춥니다. 발레리나들이 줄지어 무대로 퍼졌다 모였다 하며 바람결에 따라 좌우로 일렁입니다.


억새밭은 장엄한 백조의 호수처럼 가을공연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가을 정취를 아름답게 만드는 무대는 없을 겁니다. 하얀 발레복을 입은 억새는 은빛 물결을 만들며 춤추고, 바람은 노래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인생이 아닌 자연을 찬미하며, 예술의 전당이 아닌, 가을들녘에서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장엄하고 아름다운 공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가을 정취가 가득한 억새밭에 와 있습니다. 장엄하다는 표현이 지나치게 들린다면 그것은 질투일지 모릅니다. 상상은 자유라 했던가요. 낭만에 취한 나머지 오선지를 꺼내 음표를 하나하나 붙여 가을 무곡을 작곡하듯 홀로 분위기를 만들어 봤습니다. 이렇듯 사진은 예기치 않은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정말 보내기 싫은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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