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생은 여행이다/동유럽

스타리 모스트(StariMost)

by 훈 작가 2023. 3. 3.

다리에 얽힌 애절한 사랑을 떠올리면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생각난다.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공주 직녀와 소몰이 총각 견우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지만 옥황상제의 눈에 거슬려 견우는 동쪽에, 직녀는 서쪽에 떨어져 살도록 하면서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1년에 한 번씩 만나도록 했다. 그러나 견우와 직녀가 이를 어기자 옥황상제는 은하수 다리를 끊어버려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없게 했다. 이런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까치와 까마귀는 해마다 음력 7월 7일이 되면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주어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한 번씩 해후(邂逅)를 하게 되어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오작교(烏鵲橋)는 춘향전에서 이몽룡과 춘향이가 인연을 맺는 모티브로도 등장한다. 

파리 센 강에 퐁네프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린 프랑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무대로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화가였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가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걸인처럼 절망의 나락에서 살아간다. 화가에게는 눈이 생명이다.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화가로서 생명이 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주인공 미셸과 거리에서 불 쇼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노숙자 알렉스가 파리 센 강 퐁네프다리에서 만난다. 거리에서 함께 지내던 주인공은 미셸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미셸은 실명 전에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추억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자에게 여자는 사랑의 전부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잠시 머물던 휴식처였다. 남자는 사랑을 붙잡으려 몸부림친다. 여자는 절망의 끝머리에서 실명에 대한 새로운 치료약이 나왔다는 가족의 방송을 우연히 전해 듣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셸을 찾기 위해 가족들이 붙인 포스터에 불을 지르던 남자 주인공 알렉스는 방화죄로 3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3년 후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은 퐁네프다리에서 재회한다. 재회는 분명 해피엔딩의 메시지다. 그러나 사랑의 선택은 다를 수도 있다. 결말은 모호하다. 어디까지나 시나리오라는 스토리는 영화의 밑거름이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문학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다리는 사랑의 메시지가 있다. 때로는 그런 문학적 감동이 그려져 있는 다리가 여행의 명소가 되기도 한다. 파리의 미라보 다리도 그런 관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로 시작되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는 사랑하는 연인 마리 로랑생과 헤어진 사랑의 모티브가 있는 다리다.  
 


역사 속에 다리는 픽션(Fiction)이 아니라 팩트(Fact)가 있다. 이번 동유럽 여행에서 찾은 보스니아에는 3개의 유명한 다리가 있다. <라틴 다리>, <드리나강의 다리>, <모스타르 다리>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있는 <라틴 다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었던 곳이다. 1908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보스니아를 강제 병합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려한 후에 라틴 다리를 지나던 도중 19세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체프’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던 다리가 <라틴다리>다. 이 암살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한 마디로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역사적 무대로 기억되는 다리다.

 

 보스니아 소도시 비셰그라드에 있는 <드리나강의 <드리나강의 다리>는 오스만 제국이 1516년에 세운 다리인데, 196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보 안드리치(1892∼1975)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400여 년 동안 다리에서 일어난 24개의 이야기를 소설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안드리치는 이슬람, 가톨릭, 세르비아 정교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지닌 사람들의 갈등과 공존, 그리고 발칸반도를 지배했던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문학으로 그려냈다. ‘이보 안드리치’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 <드리나강의 다리>의 배경인 <소콜로비차 다리>는 1516년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총독 소콜로비차가 만들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유명해지기는 했으나 내용은 팩트(Fact)를 담고 있다.  

 

세 번째 다리는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이다. 1566년에 오스만 제국이 세운 이 다리는 가톨릭과 이슬람교가 공존한 다리였으나, 1993년 보스니아 내전 중에 파괴되었다. 다리의 폭은 4m, 길이는 30m이며, 네레트바 강으로 부터 높이는 약 24m이다. 2004년에 복원된 이 다리에는 ‘1993년을 잊지 말자(Don’t forget 1993)’라는 조그마한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각각 터키계 이슬람교도와 세르비아 정교인 들이 살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 당시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학살당해 이 강물에 던져졌다. 인공호수를 보수하느라 물을 빼내는 과정에서 잊혔던 죽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살아남은 이슬람교도들은 또다시 그날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 내전의 기억이 더 선연하고 참담하게 남아 있는 다리가 <모스타르>의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 오래된 다리)>다. 본래 나무로 만들어졌다가 1557년 쉴레이만 대제 때 하얀 돌로 재건되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스타르의 정교인과 이슬람교도의 가교가 되었던 이 다리는 1993년 11월 크로아티아 민병대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992년 3월 보스니아의 이슬람과 가톨릭 세력(크로아티아인)이 마음을 모아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계가 이를 거부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고, 유고 연방군이 18개월 동안 <모스타르>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계의 저항에 밀려 결국 물러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로아티아 정부를 등에 업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이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보스니악)을 몰아내려고 <모스타르>를 공격했다. 그들은 모스타르 서쪽에 살고 있던 수천 명의 이슬람교도들(보스니악)을 학살하고 추방했다. 그 와중에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리를 이루고 있던 천여 개의 돌덩이가 네레트바 강물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수백 년의 기억들도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내전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제야 세계 각국에서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 간의 상징이자 아름다운 유산이었던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불행한 사실에 주목했다. 잠수부들이 강으로 쏟아진 돌조각들을 모두 건져 올렸고, 터키 건축가들이 1,088개의 돌을 재배치해 완벽하게 재건하여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로마가 동과 서로 나뉘었을 때(395년), 그 경계에 위치해 있던 보스니아에는 가톨릭과 동방교회가 다 전파되었다. 그러다가 오스만 튀르크 지배 때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지배자와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던 민중이 새로운 정복자에 의지해서라도 살아보려고 한 불가피한 결정이다. 종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발칸반도 역사에서 보스니아는 늘 고통을 겪고 당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서는 정교회 세력인 세르비아와 가톨릭인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집단학살, 인종청소’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모스타르>에 살던 세 민족 중 가장 힘없는 민족이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보스니악)이다. 결국 약자들의 죽음이요 수난이었다. 
 


늦은 오후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들렀던 ‘메주고리예’에서는 비를 맞으며 투어를 즐겼었는데 다행히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지 다리 때문이다. 다리는 공간과 공간을 이어준다. 대개는 강이나 하천을 경계로 나뉘는 두 공간을 연결한다. 다리 하나가 여행 명소로 자리 잡을 정도면 그만한 스토리가 있거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도 예외는 아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지정되었으니 말이다. 이곳도 관광명소답게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로 가는 길목에 기념품 가게들로 즐비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거리를 오가는 여행객들이 많지는 않았다. 가는 도중에 현지인들이 관광객을 부르는 호객행위도 간간이 보였다. 

 

다리 위에서는 다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단지 다리 아래로 흐르는 네레트바 강물만 볼 수 있다. 별 느낌이나 감동이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게 무슨 구경거리가 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푸념 같지 않은 푸념이 불만으로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30m 정도 되는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를 건넜다. 홀연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슬픈 얼굴의 눈동자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저 가난한 나라 <보스니아>의 걸인으로 생각을 했었다. 더욱 마음 아프게 보인 것은 그녀의 손을 잡은 어린 소녀다. 어린 시절 우리의 1960년대 도심지의 길거리에서나 다리 밑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의 걸인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보며 손을 내민다. 그저 단순하게 불쌍하다는 모습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여인의 눈동자에는 어딘 지 모르는 슬픔이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여인의 슬픈 표정을 사진에 담고 싶은 호기심에 주머니에 있는 동전이라도 주고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어 볼까 하는 충동이 마음을 흔들었다. 망설였다. 사진의 주인공으로 담았으면 하는 강렬한 욕망이 유혹의 경계선을 넘으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망설임이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이유일까? 마치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사진을 포기하고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옮겼다. 강한 눈빛 속에 숨어있는 그림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슬픔을 넘어서 처연하게까지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것은 불쌍하다거나 측은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그렇게 느꼈다면 무거운 마음은 동정심에 불과하다. 수수께끼 같은 물음표를 가슴에 담고 그녀의 모습을 뒤로했다. 

 

수수께끼 문제가 궁금했다. 혹시나 해서 인솔자에게 궁금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가운데 한 가정을 지키던 수많은 남자(家長)들이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많은 여성들이 내전 속에 버려지고 강간이나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 아픈 상처의 후유증으로 아빠도 모르는 체 태어난 생명들이 수없이 많다. 가난한 나라 보스니아는 그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특히, 희생자는 이슬람교도 사람들이고 여자들은 사냥감이 되었다. 아마 그 여인도 보스니아 내전의 상황에서 성폭행의 희생양이 된 아픔의 씨앗이 성장해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거리의 여인으로 떠도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런 여인들이 이곳에는 많다고 한다. 그녀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민족과 종교 간 갈등이 빚은 내전의 상흔이 남긴 비극의 여인일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다리 한쪽 모퉁이에 놓인 작은 돌에는 묘비명처럼 “DON’T FORGET 93”이라고 새겨진 글귀는 살아남은 자의 애절한 몸부림처럼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들의 ‘기억’이 삶을 살리는 아픔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세우거나 만든 모든 것 가운데 다리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는 이보 안드리치의 이 말처럼, 다리는 여전히 너와 나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그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학살과 분열과 혼란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부정할 수도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과거와 진실로 화해를 하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한다. 다리는 공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는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을 이어주어야 하는 다리가 눈물과 슬픔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면 안 된다. 처연하게 보였던 슬픈 여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여인의 눈동자 속에 따뜻한 평화와 행복이 깃들길 기원하며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를 떠난다. 

'인생은 여행이다 > 동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화마을 '체스키크룸로프'  (8) 2023.08.02
부다페스트 야경  (2) 2023.07.20
플리트비체  (0) 2023.05.07
두브로브니크 골목길  (0) 2023.04.01
인생은 여행이다(1)  (0) 2023.02.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