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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단편소설

살구(3)

by 훈 작가 2023. 10. 19.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추석을 앞두고 할멈이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놀고 있는 살구를 쳐다보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 네 팔자도 어지간하다. 어쨌거나 지난 일은 다 잊어. 알았지?”
조끼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 벨이 울렸다. 
“엄마! 별일 없지?”
며느리를 앞세워 왔다 간 아들이 뜬금없이 전화했다. 
“별일은 무슨 별일, 벌초하러 언제 올 거야?”
추석이 다가오니, 먼저 저승 가신 영감의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해야 할 것이므로 할멈이 물었다.
“엄마! 요즘 누가 벌초를 해. 대행업체에 맡겨.”
아들이란 놈이 불효를 당연하게 투덜거렸다.
“오기 싫으면 그만둬. 말하는 내 입만 아프지. 됐고, 추석에 올 거지? 손자 얼굴이라도 보여줘야지.”
할멈은 화가 났지만, 손자는 보고 싶었다.
“….”
대답은 없고, 곁에 붙어 앉은 며느리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올 거니, 안 올 거니?”
할멈이 추궁했다.
“아…. 그게, 당직이 걸려서 못 갈 것 같아.”
곁에서 핑계를 말해 준 듯, 아들이 머뭇머뭇 대답했다.
“또 당직이야?”
할멈은 지난 설날에도 당직이라면서 오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재수가 없어 그런 걸, 어떡해.”
“며느리가 오기 싫어하니까. 거짓말하는 거구나?”
곁에서 며느리가 통화를 엿듣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들으란 듯 큰소리로 물었다.
“거짓말 아냐. 그건 그렇고 지난번 얘기한 거 생각해 보셨어?”
복숭아밭을 팔겠다는 말을 생각해 보았냐고 물었다. 할멈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트값 더 오르기 전에 이사 가야 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엄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줘. 안 그래?”
추석을 앞두고 난데없이 전화한 아들의 속마음이 드러났다. 
“또 손 벌려? 그런 소리 할 거면 전화 끊어.”
할멈이 기어이 소리를 질렀다.
“엄마!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라고.”
“재작년인가. 그때 마지막이라고 안 했어?”
“이번엔 진짜야. 엄마!”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했는데, 넌 풍선껌이냐?”
“….”
“왜 말이 없어?”
“엄마! 그건 그렇고 설 때는 꼭 갈게.”
“설에는 꼭 온다고? 내가 그때까지 살지 죽을지 어떻게 알아.”
할멈은 아들이 너무 괘씸해서 어금니를 물었다. 살구가 개집 밖으로 나와 걱정이나 하는 눈초리로 할멈을 바라보았다.
“엄마! 일부러 집에 안 내려가는 게 아닌데 왜 그래. 제발 좀 오해하지 마.”
“오해 안 하도록 잘하면 되잖아.”
“아들이 회사에서 안 잘리고 다니는 거 고맙게 생각해. 엄마는 뉴스도 안 봐. 요즘 구조조정이다 뭐다 해서 보따리 싸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도 생각 좀 해 봐라. 엄마도 내일모레면 칠십하고도 일곱이다. 요즘 부쩍 몸도 성치 않고. 명절 때 아들 며느리 손자 얼굴이라도 봐야 기운이 생길 텐데. 안 오니까 하는 소리다.”
할멈은 복숭아밭을 팔아가려는 의도가 괘씸했으나, 그래도 배 아파 난 아들이니, 조곤조곤 달랬다.
“엄마 통장에 용돈 좀 보냈다고 하니까. 알고 계셔.” 
용돈을 다 보냈다니, 기뻐야 하나 그렇지 못했다.
“그깟 돈 몇 푼이 효도인 줄 아냐, 다 필요 없어.” 
할멈은 서운했다. 보아하니 아들 식구가 추석 명절에 오지 않을 모양이다.
“엄마!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
아들이 전화를 끊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자식 다 키워 놓으면 호강할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할멈은 마루 밑에서 장화를 꺼내 신고 헛간으로 들어갔다. 낫과 갈고리를 챙기고, 망태기를 둘러멨다. 할멈은 영감의 벌초를 하다가 잃어버릴까, 휴대폰을 망태기에 넣었다.
“너도 갈래?”
살구가 꼬리를 살살 흔들며, 할멈에게 아양을 떨렸다.
“할멈 심심하니 같이 가자.”
농로 끝머리에 징검다리가 놓인 도랑을 건너 산길로 올라갔다. 숲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푸드덕 소리가 났다. 할멈이 깜짝 놀라 멈칫 섰다. 장끼 한 마리가 날아오르며 숲으로 사라졌다. 살구가 꿩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왔다.
벌초를 끝낸 할멈이 영감 산소 앞에 앉았다. 멀리 들판 건너 왼쪽에 마을이 보였다. 머리에 둘렀던 노란 수건을 풀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살구를 찾았다. 초롱초롱하고 까만 살구의 눈망울을 보니 손자 얼굴이 떠올랐다. 
“영감. 나 언제 데려갈 거요. 이제 추석이 와도 명절 같지 않아. 하루하루 사는 게 적적해서 싫어. 당신이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으면 더 잘해주었어야 했는데….” 
묘지 옆 풀숲 언저리에 쑥부쟁이가 보였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꽃에 앉았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와 연정을 나누는가 싶더니, 하늘로 날아갔다. 할멈이 보라색 쑥부쟁이 송이를 꺾어 묘지 옆에 앉았다. 쑥부쟁이를 쥐고 영감과의 옛날에 빠져들었는데, 살구가 바짝 다가와 할멈 얼굴을 혀로 핥았다. 
“아이고, 간지러워 이놈아, 그만해.”
할멈은 싫지 않은 듯 살구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녀석을 남편이 보내주었나 보다 생각했다. 
살구가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돌려더니, 재빠르게 소나무 아래 놓인 망태기로 달려가 멍멍 짖었다. 할멈이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자, 살구가 할멈의 바지춤을 물고 끌었다. 
“왜 그래? 살구야!”
할멈이 살구를 따라 망태기로 가니, 휴대폰 벨이 울리고 있었다.
“엄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시댁의 추석 명절을 지내야 오던, 딸의 전화가 왔다.
“벌초하느라고 못 들었어.”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지.”
“일은 무슨 일, 아무 일 없어.”
“얼른 와, 지금 집에 와 있어, 김 서방이랑 같이.”
“김 서방이랑?”
사위가 왔다니, 할멈은 마음이 급해졌다. 추석 명절에나 오던 딸과 사위가 웬일인가 싶었다. 살구가 앞장섰다. 녀석은 영리하게도 오던 길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살구가 앞서가다가 뒤돌아보았다. 앞서가던 살구가 갑자기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살구야! 왜 그러니?”
할멈이 걸어가다 깜짝 놀라 멈칫 섰다. 할멈이 걸어갈 길바닥에 독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렸다. 
“아이고 살구 아녔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고맙구나. 고마워.”
할멈의 고맙다는 말에, 살구가 멍멍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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