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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단편소설

살구(7)

by 훈 작가 2023. 10. 23.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어제저녁 느닷없이 아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았다. 할멈은 마을 어귀로 나와 아들을 기다렸다. 살구가 느티나무 정자 주변을 한가로이 왔다 갔다, 하더니 언덕으로 올라갔다. BMW 승용차가 마을로 들어와 마을회관 공터에 멈추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내렸다.
“왜 둘만 와?”
할멈은 손자가 더 보고 싶었다.
“할머니 집은 화장실이 무섭다며 안 가겠다는데 어떡해….”
아들이 투덜거리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봄에 아파트처럼 다 고쳐 놓았는데….”
할멈이 서운해서 말끝을 흐렸다. 건강은 어떠냐고 안부를 묻는 며느리가, 할멈은 달갑지 않았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살구가 길을 안내하며 앞장섰다. 할멈이 손자 손녀가 학교에 잘 다니는지 묻지 않았다. 아들이나 며느리의 대답은 무성의할 것이고, 둘의 관심은 복숭아밭이기 때문이었다. 
며느리가 들고 온 쇼핑백을 시어머니 앞으로 밀었다. 
“뭐냐?”
“수입 과일 세트예요.”
“수입 과일?”
“드셔 보세요. 시골에서 구경하기 힘들잖아요.”
“그래. 알았다.”
할멈은 썩 내키지 않았다. 며느리 체면 때문에,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부모가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데. 수입 과일을 사 오다니. 정신머리가 있는 건지.
아들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뭘 찾니?”
“지난번에 놓고 간 은행 대출서류 어디에 두었어?”
“그건 왜?” 
“빨리 내놔.”
할멈이 장롱 이불 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아들이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할멈에게 내밀었다.
“엄마! 도장 좀 찍어 줘.”
“난 못 찍어.”
“엄마. 돈은 내가 알아서 갚는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말고 제발 좀 찍어줘.”
아들이 짜증을 섞어 언성을 높였다. 
“네 아버지, 고모네 은행 보증 섰다가 어떻게 됐니? 그 돈 갚느라 퇴직금 한 푼 만져보지 못했어. 같은 핏줄이라 말도 못 하고 꿍꿍 앓으며 술로 살다가 화병까지 났지. 그러다 장날 한잔 걸치고 집으로 오다가 교통사고로 저세상 사람 됐어. 그나마 보험금에 합의금 보태서 복숭아밭이라도 샀으니, 먹고살며 자식 대학까지 보냈어. 과수원은 네 아버지 영혼이여. 내가 그걸 어떻게 은행에 담보로 저당 잡혀. 너도 생각 있으면 말해 봐.”
할멈은 서운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엄마. 걱정하지 말랬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은 내가 다 알아서 갚는다고. 아들 못 믿어. 엄마! 정말이야. 걱정 안 해도 돼.”
“네 고모도 똑같이 말했어. 돈이 거짓말하는 줄 알아? 사람이 거짓말하지.” 
“어차피 복숭아밭은 나한테 물려줄 거잖아.” 
“네 누나는 아버지 자식이 아니란 말이야? 누나는 누나가 번 돈으로 결혼했어. 그놈의 빚보증 때문에 혼수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해, 사위만 보면 지금도 얼굴을 들 수 없어. 그래도 착한 김 서방이 몸만 와도 괜찮다며 결혼만 허락해 달라 사정해, 못 이기는 척하고 보냈단 말이다. 그런 엄마 마음이 어떤지나 넌 알고 하는 얘기야? 아무튼 복숭아밭 절반은 무조건 네 누나 몫이다.”
“엄마. 누나는 출가외인이잖아.”
“며느리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넌 그래도 대학까지 나왔잖아. 같은 여자니까 한 번 대답해 봐.”
“….” 
할멈의 추궁에 며느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해야겠다. 그간 네가 떼쓰며 전답 팔아 가져간 돈이 얼마인지 기억이나 하니?”
“….”
“네 누나. 선산 판 거 아직도 몰라. 그리고 생각해 봐. 엄마는 평생 시골구석에서 너희들 뒷바라지만 하고 살다 죽으란 말이니?”
할멈이 시선을 며느리로 돌렸다. 아들도 며느리도 말이 없다.
“저번에 와서 뭐라고 말했어. 농사 그만두고 요양원에 가 쉬라고? 빨리 죽으란 소리 아니냐? 솔직히 너희들 엄마 생각은 하고 사는 거니?”
급기야 할멈이 울먹였다.
“엄마. 왜 며느리에게 그래? 무슨 잘못 있다고.”
할멈은 이 지경에도, 며느리 편을 드는 아들이 몹시 서운했다.
“이제 너희들한테 효도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그저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다 죽는 게 소원이다.”
할멈이 물러나 앉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안 찍어 줄 거야? 좋아. 안 찍어 주면, 다시는 이 집에 안 와. 그래도 좋아?”
아들이 돌아앉은 할멈을 협박했다.
“오든지 안 오든지, 네 맘대로 해. 언제 자주 오기나 했어? 돈 필요할 때만 뻔질나게 내려왔지. 그래 안 그래?”
할멈이 돌아앉은 채 철딱서니 없는 아들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아들 필요 없다 이거지? 정말 이 아들이 필요 없다 이거야? 알았어. 엄마 소원대로 해 줄게.”
아들이 잔뜩 화가 난 듯 일어났다.
 “여보! 일어나.” 
아들이 며느리를 일으켜 세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추석 전에 혼자 내려와 그러더니, 또 한 바탕 난리를 쳤다. 할멈은 속을 뒤집어 놓고 간 아들이 한없이 서운했다. 같은 배로 난 자식인데, 왜 이리 다른지 모르겠다. 시부모 모시며 자식 키우랴 농사일하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먹고살 만한 집으로 시집왔는데. 팔자가 어찌 이리도 사나운지, 할멈은 한스러웠다. 
딸을 대학에 못 보낸 게 가장 후회됐다. 아들은 힘든 살림에 재수까지 시켜 서울로 대학을 보냈다. 해 줄 만큼 했는데, 아들은 아직도 철이 없다. 화가 났다. 지금이면 아들 며느리 효도는 고사하더라도, 아들 며느리 때문에 서운하게는 살지 않아야 할 나이인데…. 
저녁나절 용식 할멈이 찾아왔다. 
“재석이 다녀갔다며?”
“다녀가면 뭘 해. 속만 잔뜩 뒤집어 놓고 갔는데.”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있잖아요.”
“무슨 놈의 팔자가 이런지 모르겠어.”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 그래도 자식들 다 잘 사는 데 뭘 그래. 삼식이네 아들은 아직도 장가 못 들어 외국 며느리 본다고 중국 갔다 오고, 이번엔 베트남에 맞선 보러 간다고 하던데. 그에 비하면 이 집 이들은 효자지,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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