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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단편소설

살구(8)

by 훈 작가 2023. 10. 24.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배려 받았음

 

 

할멈은 은행 서류에 도장을 찍을지 말지 고민했다. 맞벌이하는 데 왜 대출을 받는다고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애들 학군인지 뭔지 때문에 이사 가야 한다는 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엄마다. 통화해도 괜찮니?”
할멈이 고민 끝에 딸에게 전화했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어제 동생이 왔다 갔어. 그런데 아직도 대출받아야 한다며 도장 좀 찍어 달라고 난리다. 어떡하면 좋냐?”
“엄마. 해 주면 안 돼. 나중에 쫓겨나면 어떻게 하려고. 올케 하는 거 보면 뻔해. 안 모실 거라고. 그럼 엄마 갈 데는 요양원밖에 없어. 내가 모시려고 해도 시부모 다 살아계셔서 힘들어. 알잖아? 엄마.”
할멈이 고민 끝에 마음먹은 생각을 딸이 극구 반대했다.
“그래. 알았어.”
“엄마! 절대 안 돼. 알았지.”
살구가 공을 입에 물고 슬금슬금 할멈에게 다가왔다. 눈치챈 할멈이 공을 마당으로 던졌다. 살구가 공으로 달려가 입에 물고 다시 뛰어왔다. 할멈이 멀리 던졌다. 그렇게 놀아 주다가, 할멈이 공을 담장으로 던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벽에 걸린 남편 사진을 할멈은 한참 바라보았다. 남편을 빼다 닮은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오죽하면 아들이 저럴까, 싶다. 마음이 아려왔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내가 왜 이럴까,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할멈이 장롱 서랍을 열고 은행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해가 질 무렵. 할멈이 비닐봉지에 소주를 챙겼다. 살구가 경호원처럼 바짝 따라붙었다. 노을이 붉게 물들어 아름답다. 영감이 살아있으면, 지금쯤 이 길을 같이 걸으련만….
남편 무덤에 웃자란 풀을 뜯어내며 할멈이 입을 열었다. 
“영감! 용서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날 뭐라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꼭 한마디 들어야 할 것 같구먼. 아들이 갖고 온 은행 서류에 도장 찍었어. 당신한테 허락도 안 받고, 어금니 물고 찍었어. 도장 안 찍어 주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영감. 내 맘 알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우리 자식이잖아.” 
지켜보던 살구가 살며시 할멈으로 다가왔다. 할멈이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돌렸다. 살구가 할멈의 심사를 아는 듯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할멈이 소주를 종이컵에 부었다. 
“당신 먼저 한잔해요.”
술을 무덤에 붓고, 할멈이 한잔 마셨다. 살구가 할멈에게 코를 실룩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술기운이 오르는 듯, 얼굴이 노을빛으로 달아오른 할멈이 살구를 바라보았다. 살구가 할멈의 위태로움을 살피듯 마주 바라보았다.
어둑해졌다. 할멈이 돌아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바닥이 기우뚱하며 다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도랑물이 심란하게 흘렀다. 달빛에 징검돌이 흐릿했다. 먼저 건넌 살구가 할멈에게 멍멍 짖었다. 
도랑을 건넌 할멈이 밤하늘을 보았다. 수많은 별이 할멈을 향해 내려오는 것 같다.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데, 마음 같지 않다. 머리가 빙빙 돈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수확하지 않은 논으로 고꾸라졌다. 살구가 컴컴한 밤하늘로 멍멍 짖기 시작했다. 
할멈이 일어나려 했으나, 마음뿐이었다. 누군가 도움을 받아야 했다. 주머니를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았다. 아차 싶었다. 은행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 휴대폰을 책상 위에 놓았던 거였다. 덜컥 겁이 났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할멈이 소리쳐야 소용없었다. 이러다 죽는구나, 서글퍼졌다. 어지럽고 혼미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살구가 논으로 내려와 할멈 옷자락을 물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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