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단편소설

사랑하면 안 되니(6)

by 훈 작가 2024. 1. 13.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사춘기

 

  “아들! 부탁하나 들어줄래?” 차은희가 아들 방을 노크하며 말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지, 아들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살짝 문을 연 아들이 묻는다.
“뭔데?”
“엄마 방, LED 형광등 하나 나갔는데, 좀 바꿔 줄래?”
“사다 놓았어?”
“파우더 룸 거울 앞에 있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럼, 피트니스클럽 다녀올게. 부탁해?”
“알았어.”
   일요일 오후, 피트니스클럽은 여유로웠다. 회원들이 많이 나들이 간 모양이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 러닝머신에서 20분가량 땀을 흘렸다. 약간 숨이 차다. 3~4분 정도 쉰 다음 근력 운동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빈 헬스 기구가 많이 보였다. 일주일에 3번은 와야지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기껏해야 2번이다. 앉아 있으면 쓸데없는 잡념이 생각날까 봐 일어났다. 가슴, 등, 하체 순으로 근력 운동을 마무리했다. 
   금방 한 시간이 지나갔다. 온몸에 땀이 젖었다. 하지만 개운한 느낌이 든다. 흰색 두 타-올 두 장을 들고 핀란드식 사우나로 들어갔다. 비 오듯 땀이 난다. 뜨거운 열기 속에 눈을 감자 아들 얼굴이 떠오른다. 사우나에 들어올 때까지 안 그랬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마음을 헤집고 다닌다. 이래서 옛 어른들이 무자식이 상팔자라 했는지 모르겠다.
 
   수현이가 엄마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려 보니 한쪽 불이 안 들어온다. 파우더 룸 거울 앞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조명등 아래에 놓고 올라가 커버에 붙은 볼트를 풀었다. 한쪽 끝이 검은 LED 형광등을 분리한 다음 새것으로 교체한 후 스위치를 켜본다.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의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을 때 파우더 룸 벽면에 피노키오 줄 인형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 보지 못했던 여권도 화장품 옆에 보였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무심코 펼치자 안쪽에 승객 소지용 비행기 탑승권이 끼어 있다. 날짜를 보니 지난 8월 광복절 연휴 마지막 날이다. 자세히 보니 핀란드 항공편 헬싱키 출발, 인천공항 도착이다. 그것도 비즈니스석이다. 엄마가 유럽 출장을 갔다 왔나 보다 생각하며 그 자리에 놓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수현이가 입을 열었다.             
“안방에 있는 피노키오 인형 어디서 산 거야?” 
   차은희는 얼떨결에 선물 받은 거라 둘러댔다. 
“누구한테?”
“상반기 영업실적 우수직원 포상으로 동유럽 연수를 보냈거든, 그때 엄마가 추천해 준 직원들이 고맙다고 사 온 거야.” 
“그래.”
“무슨 인형이 실로 연결되어 있어?”
“어, 마리오네트라고 인형극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줄을 연결한 인형이라 그래.”
   수현이는 엄마가 뭔가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돈가스 어떠니? 엄마가 직접 한 건데.”
“웬일이야 이런 걸 다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하자 차은희는 서운했다. 수현이는 엄마가 뭘 감추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먹을 만해.” 
“엄마는 우리 수현이가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엄만, 아직도 내가 초등학생인 줄 알아. 이젠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그 말에 차은희는 마음속으로 움찔했다. 
“수현아, 롱 패딩 하나 사줄까? 겨울 신상 나온 것 같던데.” 
   수현이는 엄마가 자꾸 말을 돌리려 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엄마! 솔직히 말해봐.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지?”
“엄마가 뭘?”
“직원들이 동유럽 간 게 아니라, 엄마가 간 거잖아.”
“….”
   순간 차은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다. 그래, 이왕 엎질러진 물, 다 얘기하자. 
“수현아! 미안해. 사실 다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어.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사춘기잖아. 네가 알면 공부에 지장이 있을까 봐, 말하지 못했어, 오래전 약속한 것도 있고. 하지만 속일 생각은 없었어. 언젠가는 말해야지 했어. 다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듣고만 있던 수현이가 말을 꺼냈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엄마가 너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 있니? 안 그래 수현아.”
“….”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가 오래전부터 이상하긴 했다. 옷차림도 그랬고, 출근길에 힐을 신으며 어떤 게 잘 어울리냐며 번 갈이 신어 보며 물어본 것도 그렇고, 화장도 전보다 진해진 것 같아 수상했다. 어느 날 혜진이한테 그런 이야기를 꺼냈더니 너의 엄마 애인 생긴 것 같다고 말했었다. 수현이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약속한 게 있으니까. 
“수현아, 엄마 사랑하는 사람 있어,”
“엄마, 바람피운 거야.”
   수현이 얼굴이 상기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전에 못 보던 아들 표정이다. 은근히 차은희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들이 바람피웠냐는 말에 차은희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도 덩달아 언성이 올라간다.
“수현아, 말 좀 가려서 했으면 좋겠다.”
“뭘? 엄마가 뭘 잘했다고 그러는 거야.”
“너, 엄마가 바람피웠다고 생각하니?”
“그럼, 바람이 아니고 뭐야?”
“수현아, 지금 엄마에게 아빠가 있어, 없어?”
“그게 뭐 중요해.”“바람은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거잖아.”
“….”
“그래, 안 그래? 넌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니까,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잖아.”
“어, 어쨌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잖아.”
“엄마는 수현이한테 미안한 거 딱 한 가지야. 솔직하지 못했다는 거. 그런데 엄마 생각엔 우리 수현이가 사랑하는 거와 바람피우는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엄마는 사랑한 거지. 불륜이 아니야. 엄마가 이혼한 여자라 사랑하면 안 되는 거니?” 
“엄마는 나한테 그렇게 당당해. 솔직히 그동안 엄마,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어. 내가 아빠 없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장래 꿈이 뭔지.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관심 없잖아.”
   수현이가 말을 돌린다. 엄마에게 서운했던 게 많은 모양이다. 차은희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을 끊으려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참았다. 
“아, 엄마가 관심 있는 거 딱 하나 있네. 내 성적표. 그나마 내가 공부라도 못했으면 엄마가 어땠을까 싶어. 엄마 알아? 사실, 나 공부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거 따로 있어. 그게 뭔지 모르지. 공부하고 전혀 관계없어. 공부는 엄마 마음에 들려고 억지로 한 거야.” 
   아들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차은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엄마, 모르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애들한테 따돌림당하고. 허구한 날 빵셔틀 당하고, 엄마가 준 용돈으로 걔들한테 떡볶이 사주고, 피시방 가서 대신 돈 내주며 지낸 거,”
“….”
   차은희는 “미안해 수현아.”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화가 난 아들이 진정되기만 기다렸다. 듣기도 싫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였는지 정말 몰랐다. 부족한 엄마였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들에게 다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들이 모든 걸 이해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수현아, 엄마도 좀 얘기하자.”
“무슨 얘기. 할 얘기 다 했잖아. 맞아, 엄마 말대로 불륜 아니야. 그러니 하고 싶은 사랑, 실컷 하라고. 이제야 알 것 같아. 엄마가 네게 관심이 없었던 이유를. 엄마, 지금 이해해 달라 말하고 싶은 거잖아.”
“….”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것도 모르고, 엄마는 엄마 인생만을 위해 산 거야. 나한테 사랑이란 게 없었던 거야. 그래도 이만큼 키워준 거 고맙게 생각해야지.” 
   녀석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속이 상했지만, 차은희는 꾹 참았다. 그러면서 말이 끝나면 차분하게 말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이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문 닫는 소리가 ‘쾅.’ 하고 거실에 울렸다. 심란한 마음으로 일어난 차은희가 식탁만 대충 치우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냉정하게 보면 아들에게 무관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아들이 사춘기라 그렇겠지 하는 생각만 든다.

'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 >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면 안 되니(8)  (92) 2024.01.15
사랑하면 안 되니(7)  (117) 2024.01.14
사랑하면 안 되니(5)  (113) 2024.01.12
사랑하면 안 되니(4)  (127) 2024.01.11
사랑하면 안 되니(3)  (28) 2024.01.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