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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달빛 열차의 추억

by 훈 작가 2024. 2. 3.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진 풍경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차역에서 열차 타는 일입니다. 요즈음 스마트 폰에 코레일 톡 앱을 깔고 승차표를 예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역 창구에서 표를 직접 사거나 대합실에 설치된 자동발매기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KTX 등장으로 비둘기호나 통일호는 사라졌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개찰구에서 역무원이 하나하나 검표하는 일도 볼 수 없고, 승무원이 객실 안에서 불시에 표검사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열차표를 회수했던 풍경도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특히, 명절을 앞두고 오가는 귀성열차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혼잡했습니다. 어렵게 열차에 오르더라도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좌석까지 가려면 통로에 입석 표를 끊고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낯선 이들과 어깨를 부딪히고, 서로 겹치고, 다리가 엇갈리면서 지나가야 했습니다. 여기에 집에 가지고 갈 선물 보따리라도 있으면 진땀깨나 흘려야 했습니다.


선반에 선물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내 모습은 엉망이 된 상태입니다. 모처럼 꺼내 입은 신사복 정장은 누더기처럼 구겨져 있고, 반짝이던 구두는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향 가는 길은 고생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입니다. 행여 표를 끊고도 기차를 타지 못할까 앞다퉈 출입문으로 몰려들어 아우성치거나 심지어 어린아이를 열차 유리창을 통해 태우는 일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기차는 정차 시간이 길어져 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연착되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어떻게든 그 많던 사람이 탄다는 사실입니다.

객지 생활하던 사람들은 모처럼 고향 가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부모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보고 싶은 친구들 얼굴도 하나둘 떠오릅니다. 한동안 서울말만 들리다가 어디선가 경상도 사투리도 들려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 악센트가 강해집니다. 말끝마다 ‘~나’와 ‘~노’가 많아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이 되어 버렸고 지방은 쪼르라 들었습니다. 깍쟁이같은 서울말이 대한민국을 통일했습니다. 정겹던 사투리를 쓰는사람은 천연기념물처럼 보기 드문 세상이 되었고 민속 박물관에나 가여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객지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밤 열차를 많이 탔습니다. 주말마다 경부선을 탔습니다. 한 달 치 열차표(왕복)를 한 달 전에 어김없이 예매했었습니다. 서울에서 하숙하며 직장 생활할 때는 주말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다시 대전에서 서울로. 부산으로 발령받아 근무할 때는 집이 청주였습니다. 그때는 조치원에서 구포로, 다시 구포에서 조치원으로. 주로 무궁화호 밤 열차를 탔습니다. 지금처럼 KTX가 없었던 시절이었니다. 대신 새마을 호가 있었으나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빠르진 않았지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밤 열차를 보면 생각납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열차는 추석 명절 때 집으로 갈 때입니다. 차창 밖으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보이면 절로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님 얼굴이 보름달과 오버 랩 되어 보일 때는 눈물까지 핑 돌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절 지나서 다시 객지로 갈 때, 달을 보노라면 너무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구멍가게 들러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하숙방에 간 적이 한두 번 아니었습니다. 그래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명절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명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요즘은 명절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명절 연휴를 통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매년 명절 연휴 때면 인천공항은 해외로 여행을 떠나려는 여행객으로 북적인다는 뉴스 보도를 보곤 했습니다. 아마 올해도 똑같은 뉴스가 어김없이 TV 저녁 뉴스 시간에 전파를 타고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온 가족이 모여 제사상도 준비하고, 차례를 지내던 명절이 언제부터 인가 부부간에 갈등의 원인이 되고, 따로 시댁과 친정으로 가 지내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현실입니다. 급기야 차례를 지내지 않는 MZ세대가 7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처럼 명절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풍요로웠던 명절은 추억은 전설이 된 것 같습니다. 설렘이 사라진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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