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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슬픈 연가' 의 반전

by 훈 작가 2024. 2. 16.

산길로 접어들자, 어둠뿐이었습니다. 전조등 불빛이 짙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산길을 비추어 줍니다. 꼬불꼬불 구부러진 산길은 아나콘다가 지나간 듯 우거진 숲을 머리에 이고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이어졌습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왼쪽이 호수로 표시되어 있지만 보이는 건 검은 장막뿐입니다. 운전하는 게 우주선을 조정하는 기분입니다. 

먹물을 가득 부어 놓은 것 같은 차창 밖은 어둠이 만든 우주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암흑의 세계는 사람의 심리를 두렵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전깃불이 없던 어린 시절 밤에 화장실 가는 일이 너무 무서워서 긴긴밤을 꾹 참았던 기억이 짧게 스쳐 지나갑니다. 드라마 ‘슬픈 연가’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으로 일출 사진을 찍으러 가는 길입니다. 

목적지(대전시 동구 마산동 산 45-6)에 도착해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호수 쪽으로 걸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로 데크(Deck)로 조성된 길이 보였습니다. 새벽하늘에 별들이 소곤대며 나를 지켜보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 풀숲에서 ‘푸드덕’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호숫가 수풀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소리 나는 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불빛과 내 발걸음 소리에 놀란 물오리 떼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녀석들에게 민폐를 끼친 불청객이 되었습니다. 단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호숫가 길을 따라 20여 분을 걸었습니다. 어둠이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는지 동쪽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호수의 풍경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의 신음이 입가에 새어 나왔습니다. 호수 쪽 하늘이 짙은 구름에 덮여 있습니다. 호수에 담긴 하늘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그렸던 일출 사진의 꿈이 물거품처럼 날아가는 순간입니다. 말 그대로 '슬픈 연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슬픈 연가'의 일출 사진은 짝사랑이었나 봅니다.

나 홀로 서서 빈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음에 없는 ‘물멍’ 때리기를 해야 했습니다. 무심한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님은 끝내 나를 외면했습니다. 나는 호수와 아무 말이 없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허탈한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처럼 사진을 찍으려 온 사람인가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아가씨로 보이는 두 여자였습니다. 그냥 있기 뭐 해 짧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스마트폰으로 호수풍경을 찍으며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두 여자가 사라진 후, 이따금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들이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아름다운 선율이 들렸습니다. 맑고 청아한 악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호숫가 벤치였습니다. 조금 전 인사를 나누었던 주인공 중 한 사람이 팬플룻(Panflute) 불고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그 소리가 새벽 호수풍경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숲 속의 아침 음악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주인공들이 있는 곳이 그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두 여인이 떠나기 전에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삼각대를 펼치려다 보면 기회가 날아갈 것 같아 서둘렀습니다. 연출 사진이 아니기에 흔치 않은 장면입니다. 갑자기 설렘과 흥분이 내 마음을 마구 두들겨 대기 시작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반전입니다. 밤잠을 설치며 왔던 슬픈 연가 촬영지였습니다. 찍으려고 했던 일출을 찍지 못해 허탈하다 못해 우울했었는데 일순간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드라마 ‘슬픈 연가’가 ‘환희 연가’로 상황이 바뀐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두 여인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보낸 선녀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슬픈 연가’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관련된 드라마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는 슬픔의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언덕을 넘어야 아름답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해피 엔딩으로 가는 길목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있어야 극적이고 더 흥미진진합니다. 

슬픈 연가에서 찍은 이 사진은 그런 느낌을 내게 준 사진입니다. 전날 일기예보를 다 확인하고 왔는데 예상과 달리 실망이었습니다. 종종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러려니 하고 발길을 돌립니다. 하늘의 뜻인데 어찌하겠습니까. 드라마의 반전 같은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슬픈 연가'의 반전이라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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