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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지나간 자리

by 훈 작가 2024. 2. 17.

제트기가 지나간 자리에 가늘고 긴고 흰 구름이 생겼습니다. 엔진에서 내뿜은 가스에 수증기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하늘 높이 비행하는 탓에 공기 온도가 낮아 수증기가 곧바로 응축되어 작은 얼음 입자들로 변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흰 구름의 정체는 바로 이 얼음 입자입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구름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증기로 변하고, 얼마 후 흩어져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겨울이 지나간 자리엔 봄이 채워질 겁니다. 봄은 바람과 함께 올 겁니다. 겨울이 바람과 함께 온 것처럼 말이죠. 봄바람은 같은 바람이지만 다른 바람입니다. 차갑고 혹독했던 바람이 아니라, 따사롭고 만물이 생동하게 만드는 바람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겨울의 독재를 지워버린 것은 사랑이 실린  따뜻한 바람의 외침이었습니다. 오직 사랑의 절규의 바람만이 봄의 왈츠에 맞추어 환희의 찬가를 부르게 합니다.


삶이 지나간 자리에는 뭐가 채워질까요. 아마 또 다른 삶이 채우질 겁니다. 그런 삶의 인생도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보면 사는 건 잠시 머물렀다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우린 어떤 바람이어야 할지 오롯이 자신의 몫입니다. 사나운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와 상처 그리고 고통을 남습니다. 하지만, 봄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생명의 환희와 꽃이 핍니다. 
 
지난겨울 하얀 눈밭에 남겨 놓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 남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발자국은 지워진 지 한참입니다. 이렇듯 잠시 머물듯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생, 대부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는 누군가의 삶의 기억 속에 남습니다. 그 기억이 아름답게 남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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