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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터키

열기구 투어

by 훈 작가 2024. 2. 18.

저녁 늦게 카파도키아에 도착하자마자 식사를 마친 후, 벨리댄스를 구경하고 동굴 호텔로 돌아왔다. 몸은 피곤한 데 잠이 오질 않았다. 내일 새벽 열기구 투어 때문이다. 그런 사이 깜박 잠이 든 것 같은데 모닝콜이 울린다. 새벽 4시,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 올라가지 않았다. 잠을 내쫓아야 하는데 몸은 한 없이 무겁기만 하다. 패키지여행을 즐기는데,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새벽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다. 

그래도 꿀맛 같은 단잠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터키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열기구 투어는 상상 이상의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번 여행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나 마찬가지인 열기구 투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옵션이다. 그럼에도 단잠의 달콤함의 유혹을 물리치기엔 침대 위 이불의 따스함이 너무 포근하다. 


새벽 4시 30분. 열기구 옵션 투어를 신청한 우리 일행이 한 팀, 두 팀 호텔 앞으로 나왔다. 오래된 듯한 중형버스가 엔진소리를 내며 대기 중이다. 버스도 피곤한 듯 숨 가쁜 엔진소리를 뿜어내고 있다. 가이드가 인원 확인을 마치자 곧바로 버스에 승차했다. 피곤한 몸을 버스 좌석에 맡기고 기댄다. 운전기사는 총알택시도 아닌데 뭐가 그리 바쁜지 거칠게 차를 몰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린다. 

길게 뻗은 전조등 불빛이 100m 달리기 하듯 어둠을 몰고 달린다. 20여 분을 질주한 버스가 멈추자, 인솔자가 큰소리로 깨웠다. 버스에서 내려 옛날 시골 버스 터미널 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로 붐비는 건물 안은 혼잡했다. 모두가 열기구 옵션을 하려는 여행객인 모양이다. 인솔자가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며 따뜻한 차와 빵 한 조각을 가져왔다. 그가 열기구에 탑승할 업체와 협의하러 간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인솔자가 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또 달린다. 어둠이 조금씩 옅어졌다. 얼마 달리지 않아 우리는 열기구 탐승 장소에 도착했다. 8월의 새벽공기가 조금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리니 커다란 열기구 풍선에 버너로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축 늘어진 고무풍선 안으로 공기 들어가는 소리가 “훅~ 훅~” 들리면서 커다란 열기구 풍선 모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른 열기구 풍선이 여기저기 만들어졌다. 커다란 풍선에 연결된 사각형 바구니가 보였다. 내부는 4칸으로 나뉘어 있고, 열기구 직원이 균등하게 인원을 배분하여 기구에 타도록 탑승을 도왔다. 탑승 인원은 35~40명 정도였다. 우리 가족이 탄 칸에 유럽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 2명과 타 여행사 한국인 4명을 포함해 총 9명이 같이 탔다. 탑승이 모두 완료된 것 같다. 


파란 하늘을 덮고 있던 어둠이 가시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열기구업체 직원 여러 명이 기구에 연결된 동아줄로 무게 중심을 잡고 이륙 준비를 서두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최종 점검을 하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륙 준비가 모두 끝난 것 같다. 마치 활주로에서 관제탑의 지시를 기다리는 비행기처럼 열기구 안에 탄 여행객들은 잠시 숨을 죽였다. 적막한 침묵이 흐른다. 

마지막 이륙 전 점검인 듯 열기구 조종사와 지상에 있는 직원과 무전기로 교신을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열기구를 잡아 주던 동아줄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드디어 열기구가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다. 열기구 엔진인 버너에서 “푸-욱-푸-욱 “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버너의 열기가 느껴지면서 서서히 하늘로 오르기 시작한다.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투어는 새벽 일출과 동시에 막이 올랐다. 그 시각이 오전 6시였다. 


땅이 점점 멀어진다.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듯 아주 부드러운 비행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본 카파도키아의 풍경이 들어왔다. 동시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풍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장관이다. 순간 열기구에 탑승한 우리는 모두 합창하듯 탄성을 질렀다.

”와!~아! “

말을 잃어버렸다. 언어기능이 상실된 것처럼 감탄사 다음에 이을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딱 벌어진 입이 얼어붙은 닫을 수가 없다. 그저 연달아 감탄사만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그마저도 소진되고 나면, 남은 것은 느낌표 하나다.  


넋이 나갔다는 표현이 있다. 사람은 넋이 나가면 이미 사람이 아니다. 넋은 영혼이다. 영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영혼의 주체는 있는데, 그 기능을 지배하는 감성 영역이 마비된 것 같다. 그 영역을 담당하는 감성 세포가 동맹 파업을 벌이는 모양이다. 얼마나 황홀경에 빠졌으면 그랬을까.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맞는다면 분명 황홀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어떤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 순간만은 지우고 싶지 않다. 오래도록 기억에 저장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순간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단언컨대 지구상에서 이 이상의 체험은 없지 않을까, 싶다. 환상적이란 말이 정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하늘에서 본 카파도키아 절경은 정말 환상적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비경이 맞지만, 이만한 걸작이 또 있을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카파도키아 평원을 나는 새가 되어 보고 있다. 가끔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셔널 지오그래픽 프로그램을 현장에서 직접 보는 느낌이다. 열기구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때로는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고도를 조절하며 다양한 각도와 높이에서 카파도키아의 비경을 볼 수 있도록 비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메라 다루는 공부를 좀 해둘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감탄사만 연발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일출 사진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해가 있는 방향과 반대 방향에 내가 있다. 좀처럼 그 방향으로 움직이질 않는다. 비행이 끝나기 전에는 기회가 오겠지, 하며 카파도키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능한 많은 것을 담으려 셔터를 눌렀다. 동시에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잡스러운 파일을 삭제하고, 감동이란 파일을 만들어 행복이란 폴더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땅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아니 벌써, 그럼 끝내 일출은 카메라에 못 담는 건가. 감탄사만 연발하다 보니 끝나는 건가. 아쉬움이 밀려오며 열기구는 서서히 날개를 접기 시작했다. 열기구 조종사와 지상 간의 부지런히 교신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야구 경기에서 투수와 포수 간에 주고받은 사인 끝난 것 같은 상황이었다. 투수가 고개를 끄덕인 후 그가 던진 공이 허공을 날아가는 것처럼 열기구가 착륙했다. 

꿈에서 깬 기분이다. 그것도 그냥 꿈이 아니다. 깨고 싶지 않은 꿈, 그런 꿈을 깨는 것은 꿈을 깨고 나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열기구에서 내린 기분이 꼭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가이드가 우릴 불러 샴페인이 준비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옆을 보니 커다란 열기구 풍선 속에 갇혔던 공기가 자유를 찾아 다시 바람이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먼 추억의 흑백 영상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꿈은 늘 동심(童心)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었다. 푸른 하늘은 새들의 세상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흑백 만화 영화에서 고무풍선에 달린 기구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언젠가 하늘을 날아보고 싶었다. 신기하게 느껴졌던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지 어릴 적 가끔은 고무풍선을 타고 동네 하늘을 날아다니다 떨어지는 꿈을 꾸곤 했었다.
   
시골 동네 가을 운동회는 동네 잔칫날이다. 추석이 지나고 가을 하늘이 짙어지면 어김없이 열렸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만국기 날렸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플라타너스 아래 온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다. 운동장엔 청백으로 나누어진 아이들이 큰소리 응원하는 풍경이 떠 오른다. 리어카에 수소가스 드럼통을 싣고 고무풍선에 가스를 주입하여 오색 고무풍선을 팔고 있는 아저씨도 보였다. 


할머니에게 빨간 고무풍선을 하나 사 달라고 나는 보챘다. 할머니가 하얀 실에 매달린 빨간 고무풍선을 하나 사 주셨다. 운동회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무풍선을 잡고 있던 풍선 줄을 그만 놓는 바람에 잡고 있던 빨간 고무풍선이 파란 하늘로 꼬리를 흔들며 올라갔다. 도망가는 빨간 고무풍선을 물끄러미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잠시 할머니 얼굴이 바람처럼 나타나 웃으신다. 그러더니 다시 할머니가 빨간 풍선을 잡고 먼 하늘나라로 날아가셨다.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있다. 욕망은 꿈이 되고, 우리는 그 꿈을 꾼다. 꿈은 현실이 될 때 아름답다. 인간이 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알이 스스로 깨고 나오면 새가 되지만, 남이 깨면 프라이가 될 뿐이다. 여행도 우리가 꾸는 작은 꿈이다. 그러나 그 꿈도 큰마음을 먹어야 현실이 된다. 오래전에 꿈꿨던 하늘을 오늘 아침 난 마음껏 날았다. 그것도 카파도키아 하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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