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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고혹적인 꽃 : 화엄사 홍매화

by 훈 작가 2024. 3. 29.

캐논 R6로 찍은 사진임.

벼르고 벼르다 잡았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어쨌든 잠을 자야 새벽 운전을 편하게 할 텐데, 머릿속은 온통 탐매(探梅)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런 탓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슴만 설렌다. 과연, 마음에 그리던 화엄사 홍매화 사진을 담을 수 있을까.

알람이 울렸다. 새벽 3시 30분,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은데 침대를 빠져나와야 했다. 어제까지 봄비가 내렸다. 오늘은 구름이 많고 새벽에 짙은 안개가 낄 거라고 했다. 날씨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출사 장소가 멀어 가더라도 좋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 명소는 늘 부지런한 애호가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새벽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운전할 맛이 난다. 간간이 화물트럭이 무거운 짐을 실어서인지 특유의 거친 엔진음을 토해내며 옆 차선을 달린다. 호남고속도로 익산 JC에서 순천-완주 고속도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차창 밖은 검은 장막이다. 일기예보대로 안개가 짙게 깔려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전주를 지나면서 연이어 터널구간이 많아졌다. 

캐논 R6로 찍은 사진임.

순천-완주 고속도로는 처음이다. 전에는 호남고속도로 광주 구간을 통해 가야 했었다. 고속도로 이정표에 ‘임실’이란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씩 희미한 빛이 하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안개 자욱한 산허리를 뚫은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나갔다. 날이 밝아지면서 산 능선의 윤곽이 나타났다. 남원을 지나자, 내비게이션에 도착 예정 시간이 6시 24분을 가리킨다. 30분만 가면 된다. 

구례 화엄사 IC를 빠져나왔다. 벚꽃 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꽃이 피면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될 것 같은 곳이다. 둑에 늘어선 벚꽃이 만개하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며 상춘객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을 것 같은 풍경이다. 상상 속으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 구도를 잡아 본다. 

지리산 자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우거진 숲길이 보였다. 그때 마음이 급했는지 뒤 따라 오던 렉서스 승용차가 나를 추월해 쏜살같이 올라간다. 분명 그 차도 사진 애호가인 모양이다. 매표소가 나와야 보일 텐데 안 보인다. 그러더니 곧바로 주차장이 보였다. 어, 주차비도 안 받나. 이게 왠일이지? 화엄사에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의 너그러운 마음 때문인가 보다. 

캐논 R6로 찍은 사진임.

차에서 내리니 물소리가 청량하다. 자연 그대로의 소리만 듣는 것도 힐-링이란 생각이 든다. 차를 주차하고 보니 뒤쪽에 노란 수선화가 피었다. 먼 길을 온 나를 반기는 듯하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터라, 외면해야 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일주문을 지나 올라갔다. 각황전이 보이는 화엄사 경내로 들어서자, 꿈에 그리던 꽃이 보였다.

화엄사 홍매화는 같은 매화라도 그냥 매화가 아니다. 격이 다른 명품 매화다. 선암사 선암매, 백양사 고불매, 오죽헌 율곡매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매화로 천연기념물이다. 때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하니, 매년 이맘때면 탐매(探梅) 놀이를 하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오늘이라고 다를 바 없다. 

숙종(1674~1720년 재위) 때 각황전을 중건한 후 심은 거란다. 무려 수령이 300년이라고 하니 놀랄 따름이다. 아름드리 가지마다 연지곤지 찍은 듯 붉은 망울이 고혹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단청하지 않은 각황전과 어우러진 홍매화를 바라만 봐도 아찔하다. 어쩌면 황홀하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그래, 그럴 것 같다.

스마트 폰으로 찍은 사진임.

화엄사 홍매화는 '흑매'라고도 한다. 색이 너무 붉어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홍매화는 연분홍색을 띤다. 빨간색의 매화도 있긴 하다. 하지만, 꽃잎이 첩첩이 겹쳐 피는 개량종이다. 화엄사의 홍매화는 다르다. 다섯 개 꽃잎이 정갈한 모습이지만, 꽃잎은 피처럼 검붉다. 해 뜰 무렵 빛을 받으면 정신 차릴 수 없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색감이다. 

고혹적(蠱惑的)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아름다움이나 매력 따위로 남의 마음을 홀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뜻’이다. 화엄사 홍매화에 딱 맞는 표현이다. 표현은 자유다. 그러나 함부로 고혹적이란 말을 할 수 있을까. 화엄사 홍매화를 봤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같은 매화라도 그냥 매화가 아니라고 한 이유다. 

감상에 빠져들다 보니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명당자리는 사진 애호가들로 만원이다. 예상했던 바다. 할 수 없이 비탈진 경사면으로 올라가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자세가 불안하지만, 이 자리도 감지덕지다. 그러는 사이에 앞에서 고성이 오갔다. 카메라 화각에 불청객(다른 사진 애호가)이 끼어든 모양이다. 

스마트 폰으로 찍은 사진임.

그러거나 말거나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스님이 나타났다. 오호라!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다행히 한 컷을 건졌다. 그다음부터 기다림의 시간이다. 해가 떠야 한다. 그런데 해가 아니라 안개가 밀려온다. 다시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몽환적인 그림이다. 모델로 보이는 여인도 등장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 같다.

아쉽게도 안갯속에 기대했던 햇빛은 물 건너갔다. 하나둘 삼각대를 거두면 사진 애호가들이 자리를 떠난다. 그들은 연이어 며칠 동안 계속 화엄사를 찾은 이들이다. 대작의 꿈을 접은 프로 작가들이다. 그래도 명당자리는 그대로다. 혹시 했는데, 없다. 미련 때문에 마음을 접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탐매에 흠뻑 취해 정신이 없다.
 
고혹적인 탐매의 시간이었다. 왜 화엄사 홍매화를 찾는 이들이 많은 지 알 것 같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이다. 꽃은 유혹한다. 유혹은  색이다. 그러나 유혹의 실체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유혹이라고 해서 경계할 필요가 없다. 고혹적인 유혹이 내 마음을 흔들어도 마냥 즐겁기만 할 뿐이다.  행복한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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