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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산골 마을에서 만난 봄

by 훈 작가 2024. 4. 3.

한적한 산골 마을의 봄은 적막하다 못해 낯설기만합니다. 봄의 정취가 무르익어 가는데 돌담길은 정적만 맴돕니다. 사람은 안 보이고, 돌담길 한쪽에 따사로운 봄볕에 고양이 한 마리가 졸음에 겨운 눈빛으로 앞다리를 쭈욱 뻗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슬금슬금 사라집니다. 비탈진 길옆 도랑에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졸 졸 졸’ 줄지어 마을 아래로 내달립니다.

새소리도 들립니다. 녀석들만 낯선 이방인의 등장을 알아본 듯합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니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건, 봄을 맞아 꽃망울 터트린 산수유꽃들입니다. 샛노란 꽃망울이 마치 팝콘 기계에서 막 부풀어 올라 터진 듯합니다. 봄의 함성치고는 너무 고요한 외침입니다. 봄은 늘 이렇게 이곳에 찾아왔던 모양입니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노란 꽃입니다. 보통 꽃은 짙은 색조 화장을 하고 화려함을 뽐내며 핍니다. 하지만 봄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봄꽃은 산수유와 생강나무꽃입니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금방 노랗게 물을 들입니다. 주로 생강나무꽃은 산속에서 피어 보기 어렵습니다. 마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게 산수유입니다. 

산수유꽃이 만발하면 봄은 수채화처럼 채색됩니다. 몽글몽글한 꽃망울을 터트리며 노랗게 퍼져 나갑니다. 노란색으로 연출된 봄은 산속 시골 마을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사립문 밖 돌담길 언저리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봄기운이 돌면서 메말랐던 나뭇가지마다 생기가 돋기 시작합니다. 

산 아래 저수지 길도 노랗게 물듭니다. 길가에 늘어선 산수유꽃이 물속으로 들어가 노랗게 물들여놓으면서 봄의 빛깔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입니다. 이처럼 봄은 무명 화가가 되어 수채화를 그린 듯 시골의 풍경을 노란 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울하게 보였던 마을이 환해졌습니다. 

도심의 봄은 한적함과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휴일 도심의 번화가 도로는 차량 행렬로 붐빕니다. 불청객 황사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산골 마을 풍경과는 대조적입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와 매연을 뿜어내는 차량으로 목이 따갑습니다. 아등바등하며 사는 도시 사람들에겐 싱그러운 봄이 그립기만 합니다. 


주말엔 화려한 쇼핑몰이나 백화점, 번화한 명동이나 홍대거리, 아니면 한강공원에서 봄을 소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힐-링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누립니다. 소비문화에 익숙한 생활환경 탓입니다. 나만을 위한 힐-링의 봄이나 자연과 교감하는 사색의 시간을 즐기기엔 여유가 없습니다. 그게 회색 도시의 일상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벗어나고 싶습니다. 떠나서 고향의 향수를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골 마을을 찾았습니다. 복숭아꽃, 살구꽃 대신 산수유꽃이 돌담길 사이로 가득합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질 적 뛰어놀던 논두렁 길과 소달구지 덜컹대던 신작로와 마을 뒷동산도 생각납니다. 

점점 사라지는 농촌 마을,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서울로, 서울로 떠나 텅 비어 있습니다. 이미 서울공화국은 만원인데, 아직도 대한민국의 서울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입니다. 마을 한 바퀴를 돌았는데 왜 사람이 안 보일까, 분명 여기도 사람 사는 마을인데, 생각해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색 도시가 그립습니다. 내가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일까. 본래 시골 촌놈이었는데, 언제부터 수돗물을 먹었다고 이렇게 변한 거지? 봄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다 보니 다시 마음이 변한 모양입니다. 처음엔 포근하게 느껴졌던 풍경이, 지금은 더 머무르면 외로워 못 견딜 것 같습니다. 고즈넉한 산골의 봄이 좋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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