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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중국&일본

장제스와 고궁박물관

by 훈 작가 2024. 4. 4.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첫 일정은 고궁박물관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른 시간이 12시 30분, 고궁박물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그가 대만 고궁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런던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메트로 박물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이라며, 중국 5,0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고궁박물관으로 이동하면서 가이드는 장제스와 고궁박물관에 얽힌 이야기도 했다.
 
어느 나라든 문화재나 사람이나 전쟁이 나면 비슷한 운명에 놓인다. 피난 가야 하니까. 6.25 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양안 갈등이 심상치 않다. 중국의 무력 침공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문화재도 정치적 소용돌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은 그 출발 시점이 국공내전이었고, 당시 총통 장제스는 대만으로 60만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와 유물을 옮겼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중국 대륙에도 ‘고궁박물원’이 있다고 한다. 시작은 청나라 궁중 보물이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푸이가 마지막 황제가 되었지만, 많은 유물이 관리 소홀로 사라졌다고 한다. 권력을 쥔 중국 군벌은 1925년 푸이를 베이징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그간 관리해 온 유물을 자금성에 모아 ‘고궁박물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 청나라 황실 보물을 국유화하여 중국 대중에 공개한다는 것은 300년 넘게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국가가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이 유물들은 중국 각지와 해외로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 와중에 중국을 대표하는 고 인류 화석인 베이징원인 유골을 미국으로 이송하려다 톈진 항구에서 사라지는 사건도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문화재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다시 유물을 보낼 겨를도 없이 곧바로 다시 국공내전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전황이 불리해진 국민당은 1948년 중앙은행 금괴와 함께 난징에 보관 중인 고궁박물원 유물을 대만으로 실어 날랐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1920년대부터 고궁박물원 운영에 관여할 정도로 문화재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는  3차에 걸쳐 운송한 유물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방대했다. 총 4만 6,000점에 그림이 5,500점, 그리고 서책이 54만 점에 달했다. 전체 고궁박물원의 4분의 11 정도 양이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상황에서 유물을 급하게 대만으로 옮겼지만, 수난은 계속되었다. 급하게 옮긴 탓에 보존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항온·항습 설비가 빈약한 여러 창고를 전전하다가 박물관이 세워진 1965년에서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보물을 장제스에 빼앗긴 중국은 1971년 똑같은 이름의 ‘고궁박물원’을 베이징 자금성에 개관했다. 개관 당시에는 좋은 유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수 문화재가 대만에 건너간 이유도 있었지만,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중국의 귀중한 유물이 말 그대로 엄청나게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적 수준의 유물 덕분에 세계 최고 박물관으로 인정받았다. 프랑스 루브르, 영국 브리티시 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서구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오랜 기간 식민지를 지배하며 가져간 것과 달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중국의 수천 년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보물로만 이뤄졌기 때문에 자부심이 남다르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12시 50분. 버스가 고궁박물관 입구에 멈추었다. 가이드는 관람 후 만날 장소를 알려 준 뒤 박물관 안내소에서 무선수신기를 가져와 나누어 주었다. 그가 설명하는 들으며 자유롭게 관람토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 전시실의 유물이 조명을 받아 신비스럽고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가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유물에 대한 설명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유물을 다 볼 수 없으니 아주 중요한 유물과 꼭 봐야만 할 유물을 중심으로 관람하도록 안내하며 설명했다.
 
 

취옥백채(翠玉白菜)

 
‘옥 배추’라 불리는 대만의 국보급 문화재다. 옥을 이용해 여치와 메뚜기가 숨겨진 배추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유물이다. 숨겨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흰색 줄기는 명나라, 푸른 잎은 청나라를 의미하는데, 두 마리의 곤충이 잎사귀를 갉아먹어 청나라가 망하기를 기원하며 청나라 태조가 명나라 장인에게 지시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19세기 청나라 광서제의 부인 근비가 결혼 때 가져온 혼수품이라고 한다. 흰색의 줄기와 녹색의 잎은 근비의 숭고한 인품을 상징하며, 밤에 시끄럽게 우는 메뚜기와 여치처럼 부부가 밤마다 행복하라 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다 자다손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배추는 청렴한 집안과 신부의 순결, 여치와 메뚜기는 자식을 많이 낳아 번성하라는 의미로 서태후 며느리의 혼수품으로 서태후가 죽기 전에 같이 묻어달라고 할 정도로 아끼던 유물이란다
 
그런데 왜 유명할까? 옥은 매우 진귀한 광석으로 원석에서 옥을 살려내는 것이 옥 가공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교한 기술과 창조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취옥백채는 반은 흰색, 반은 녹색의 갈라진 흔적과 반점 무늬가 있어 최고의 품질을 가진 옥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를 만든 장인은 창조적인 생각과 최고의 기술로 옥에 있는 색깔 분포를 사용하여 흰색의 줄기와 녹색의 잎을 만들었고, 갈라진 것은 잎 틈에 숨기고 반점은 서리와 추위를 맞은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자연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희대의 걸작이 탄생시켰다고 한다.
 
 

육형석(肉形石)

 
육형석은 천연석을 가공해서 기름기 좔좔 흐르는 삶은 돼지고기의 질감을 표현한 것이다. 부드러운 육 덩어리에서 육즙이 막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중국요리 동파육 같은 삼겹살. 불투명한 갈색 옥으로서 보기에는 겹겹 쌓인 삼겹살 같기도 하다. 장인은 재질과 색깔에 순응하며 가공했을 뿐이다. 맨 윗부분을 적갈색으로 염색하여 표면에 땀구멍 같은 검은 점을 만들고, 마치 간장에 조림한 돼지껍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옥돌이 기름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삼겹살 조림으로 변신한 것이다. 육형석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육형석은 자연적인 외형을 완벽하게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인 감각을 이용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육형석은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이 즐겨 먹었다는 중국의 유명한 음식 '동파육'(간장으로 조린 삼겹살)과 흡사하게 만들어서 유명하다고 한다. 옥에 정교한 조각과 염색을 통해 돼지고기 모공과 피부결까지 완벽하게 만들었고, 금방이라도 먹으면 부드러운 돼지고기에서 육즙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요 백자아기베개 (定窯 白瓷嬰兒枕)

 
당(唐) 나라의. 송대에 이르러 도자기 베개는 모양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이 어린아이가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의 베개는 일상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베개는 먼저 앞뒤 틀로 눌러 모양을 찍어낸 다음 칼로 얼굴 부분의 눈, 코, 입과 옷의 선을 그려 넣은 것이다. 베개 전체의 상아색에 회색이 약간 도는 이유는 이 베개의 주재료인 정요 자기는 구울 때 숯을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가마 안의 산화염으로 인해 유색이 약간의 회색 이 도는 노란색을 띤다고 한다. 당나라 도자기 베개 형태의 어린아이가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의 베개로, 일상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습하고 더운 날씨에 딱 어울리는 베개다.
 
 

조감람핵주(雕橄欖核舟)

조감람핵주는 감람열매로 조각해 만든 공예 작품이다. 가로는 4cm도 안 되며, 높이는 1.6cm 크기로 자세히 보면 배의 양면에 열고, 닫을 수 있는 창문이 있고 배 안의 탁자에 접시와 잔이 놓여 있다. 8명의 사람이 이 작은 배 안에 있다. 쌀알 정도의 아주 작은 인물들이 몇 개의 칼자국으로 새겨 있지만 표정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배 안의 물건들도 모두 세밀하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세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배 밑면에는 소동파의 적벽가 전문 357자까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전체 작품에 새겨진 것은 동파거사와 친구가 달밤에, 적벽에서 노는 전경이라고 하는 데 세계적으로 아주 수준 높게 평가받는 공예품이라고 한다.
 

여요(汝窯) 수선화분

 
대만 고궁박물관을 대표하는 청자다. 용도는 화분인데 구멍이 없다. 바닥에 물구멍이 없으면 화초가 썩을 텐데 왜 없을까? 하지만 물구멍이 필요 없는 화초가 있단다. 바로 수선화다. 그래서 이름이 수선화분인지 모른다. 그릇 전체적으로 유약 표면이 아무 무늬 없이 깨끗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여요(汝窯) 자기 중 이런 예가 드물어서 유명하다. 비 온 뒤 파란 하늘과 같은 고요하고 맑은 아름다움이 잘 표현된 청자인데 그냥 보면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알고 보니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상아투화운룡문투구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중국 황제의 장난감으로 청나라 때 장인 가문이 상아를 깎아 3대에 걸쳐 조각 3대(100년)에 걸친 만들었다고 한다. 상아조각으로 공 속에 17개의 공이 겹겹이 들어 있다. 각각의 공이 따로 움직이도록 조각되어 있는데, 겉에서부터 파고 들어가 공(球) 하나 만들고 그 공을 깎아, 또 그 안에 공을 또 조각해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 기술로는 14개까지 밖에 만들지 못했다니 장인들의 경이로운 솜씨다.
 
놀라운 것은 특수한 'ㄱ'자 모양의 칼을 이용해 바깥부터 안으로 깎아 들어가며 조각해 자르거나 붙이지 않고 서로 분리된 17개의 구를 정교하게 조각했다는 점이었다. 이 작품이 감명 깊은 이유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까지 무려 총 3대가 자신의 일생을 쏟아부어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2대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이 작품 하나에 쏟아부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지만, 정작 그렇게 평생에 걸쳐 작업에 몰두했음에도 생전에 완성된 작품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어쩌면 이와 같은 자기희생 정신과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이 작품이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여요 연화식온완

 
여요'(汝窯)는 중국 송나라 때 루저우에 있었던 가마로 엷은 청색 자기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소중히 여기던 도자기로 전 세계적으로 여요 유물은 30점 밖에 없다. 그중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이 26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청자 중 가장 희귀하고 아름다우며 표현하는 기법이 어렵다고 한다. 10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연꽃 모양의 대접으로 유색은 파란색을 띠는데 미세한 빙열(가느다란 금)이 나 있다. 빙열이 간 '여요' 도자기는 집을 팔아서라도 사라는 는 중국의 속담이 있을 정도다.
 

모공정

 
세 발의 솥처럼 생긴 이 유물은 외형상으로는 크게 감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보물의 형성 이유를 안다면 달라진다. 주나라 주왕은 제후들의 권력다툼과 권모술수로 왕위에 올랐다. 주변에서는 불만이 많았고 주왕은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린다. 특히, 가장 총애하였던 모공에게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등을 이야기했는데 모공은 주왕의 모든 지령을 빼곡하게 이 모공정에 새겨두었다. 모공정에는 중국 솥 중에서 글자 수가 가장 많은 499자가 새겨져 있다.
 
이 솥은 일제 강점기에도 굴곡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보물 감정사들과 역사학자들이 이 솥을 얻기 위해서 보물의 소유자인 엽 공자의 조카를 납치해 고문했다. 이에 엽공작은 꾀를 생각해 내 가짜 솥을 주고 조카를 구했다. 이후 상해의 상인에게 팔렸고 이 모공정을 소유한 자는 불행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상해의 상인은 국민당 정부를 미워해 국민당 정부에 이 유물을 기증했고, 국민당 정부는 패망하여 타이베이로 가져왔다. 처음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었을 때 유리관을 씌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대만 사람들이 하도 침을 뱉고 모욕해 현재는 유리관을 씌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비슈

 
옥황상제의 총애를 받은 벽사(비슈)는 아무 곳에서나 버릇없이 배설하고 다녀서 옥황상제로부터 엉덩이를 맞고 항문이 없어졌다고 한다. 온갖 금은보화만 먹고 다니는 비슈는 항문이 없어져 배불리 먹고도 배설하지 않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가지 않기 때문에 재물을 모은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은 집의 현관에 두면, 나쁜 액을 막아 주며, 행운을 가져온다고 이곳 사람들은 믿는다고 한다. 특히, 사업이나 장사를 하시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사업 성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은 대만에서 꼭 사 가는 기념품이라고 한다.
 

청나라 강희, 옹정, 건륭 기간의 화려한 도자기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중국 역사의 가장 화려한 시기인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 시기의 도자기는 도자기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최근 몇 년 동안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홍콩달러 1,700만 달러에 낙찰된 청나라 도자기는 그 희소성과 예술성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도자기의 유약 부분은 유리화된 물질로 붕사, 산화 티탄, 안티몬 등이 혼합된 수많은 진흙으로 빚어져 만든 예술품이다.
 

계절의 꽃과 새 도자기 병

 
2015년 10월 대만의 고궁박물관은 창립 90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이 90년의 행사에 가장 핵심적으로 선보인 예술품은 이 '꽃과 새 도자기 병'이다. 이 물병은 새가 꽃과 풀잎에 찾아드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는 사람도 찾는 이와 찾아오는 이 그리고 찾아오게 하는 이를 달리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검은색 유병에 흰색과 노란색 등을 섞어서 마치 우리나라의 자개장 무늬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당나라 시대의 두 마리 말과 장수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1,000년이 지난 후, 후손은 어떻게 평가할까? 이 그림을 본다면 해답이 보인다. 당나라 시대의 당당한 장수가 두 마리의 말을 끌고 있다. 그림 속의 말은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이 엄청나고 꼬리는 윤기가 흐르는 당당한 모습이다. 어쩌면 재벌들이 SNS에 수입차 인증사진을 찍듯이 장수도 그런 모습으로 두 마리 말을 끌며 앞을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본 장수의 모습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거칠게 보이는 외모는 그 당시에 당당한 모습이겠지만, 지금의 관점에는 지저분하다. 말 또한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역사가 남긴 유물은 우리에게 삶을 교훈을 준다.
 
전시된 유물이 너무 많아 다 볼 수 없다. 가이드는 중요한 유물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그간 몰랐던 중국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간 한 이야기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나름대로 기억을 더듬어 글을 옮길 수밖에 없다. 고궁박물관 투어를 마치면서 안내 책자를 사고 싶었다. 가이드는 모두 중국말로 되어 있어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말했다.
 
그가 한 시간에 걸쳐 이야기한 것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취옥백채(翠玉白菜)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뻥 일지 모르지만, 취옥백채에 관해 그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의 재벌 회장이 취옥백채를 얼마 주면 팔겠냐고 박물관 담당자에게 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담당자가 말하길 제주도를 준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유물의 가치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가이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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