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는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나 봅니다. 여름이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래부터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볼 때마다 자신의 멋진 몸매를 자랑하듯 드러내는데, 그게 내겐 거침없어 보였습니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어떤 나무와 비교해 봐도 나뭇결이 부드럽고 매끈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투박한 다른 나무보다 매혹적입니다. 호기심에 살짝 만져 보았습니다.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꽃이 오래 피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나무 자체입니다. 여름이라 그런지 일단 패션이 시원해 보입니다. 살짝 건드리면 바로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납니다. 마치 샤워를 하려고 금방이라도 벗어버릴 것 같은 모습입니다. 군살 하나 없는 매끈한 몸이 관능적인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흰 얼룩무늬 같은 게 있습니다. 연한 적갈색으로도 보이는 데 타투같기도 합니다.
100일 동안 꽃을 피우는 나무라서 배롱나무라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꽃이 100일 내내 피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꽃이 딱 100일간 피운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오래 핀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옛 어른들이 말하길 배롱나무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되고 꽃이 지면 여름이 다 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배롱나무꽃은여름과 인연이 깊은 꽃입니다.
배롱나무꽃이 한창입니다. 배롱나무꽃과 여름에 피는 백일홍은 이름이 비슷해 많은 이들이 헷갈리기 쉬운 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두 꽃이 비슷한 시기에 꽃을 피우니 혼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백일홍은 국화과의 풀꽃이고, 배롱나무꽃은 부처꽃과 나무에 피는 꽃입니다. 이름만 비슷했지 전혀 다른 꽃이고, 실물 꽃도 확연하게 다릅니다. 같은 건 단순히 꽃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배롱나무꽃을 찍으려고 나왔습니다. 출사지는 논산시에 있는 돈암서원입니다.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듯한 불볕더위가 장난이 아닙니다. 햇살이 너무 따갑습니다. 그럼에도 핑크빛 꽃망울을 터뜨린 꽃이 여름 내내 사진 애호가 눈길을 유혹할 겁니다. 색감이 예쁘니까 어쩔수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그런데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면 금방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꽃도 그렇지만 꽃과 잎에 가려진 나무의 질감도 은근히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은 어떻게 찍어도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배롱나무는 어떻게 찍어야 더 아름다운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전후좌우에서 찍어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보이는 건 만큼 배롱나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카메라 탓할 수도 없고, 어쨌거나 부족한 것은 내 몫입니다. 사진이란 있는 그대로를 이미지로 옮겨 오는 것에 불과한데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배롱나무를 맴돌며 연신 셔터를 눌렀지만, 흡족할 만한 걸 건지지 못했습니다. 고민 끝에 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찍어 볼 심산이었습니다. 처음엔 빛이 부족할 것 같아 꺼렸습니다. 노출 감도를 높이거나 플래시를 이용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가 불편한 걸 일단 감수하고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해보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주변에 같이 찍던 사진애호가들이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나 혼자 배롱나무 아래로 쪼그리고 앉아 찍어 보았습니다. 의외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밖에서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때론 사진도 고정관념을 벗어나 찍어야 할 때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살이도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볼 때가 다릅니다. 사진도 찍어 보니 그렇습니다. 보는 관점을 바꾸어 보면 그림이 달라지듯, 어떤 상황이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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