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z9fJc/btsLK2wXHR5/SkHySxCY7XKDzEPEO5UxR0/img.jpg)
눈을 좋아했습니다. 동심이 가득했던 시절,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아마도 눈과 동심은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듯합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동네 아이들은 신이 나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데 어른들은 무덤덤한 표정입니다. 그것만 봐도 어른보다 어린이가 눈을 좋아하는 건 분명합니다.
시골 고향 마을이 생각납니다. 눈이 올 것은 같은 날이면 방에서 놀다가도 혹시 밖에 눈이 오나 안 오나 보곤 했었죠. 그러다 마침내 눈이 내리면 ‘야, 눈 온다.’ 소리치며 뛰어나옵니다. 앞마당에 있던 바둑이도 덩달아 멍멍 짖습니다. 마을 공터로 나갑니다. 어느새 또래 친구들이 나와 있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https://blog.kakaocdn.net/dn/sBmYu/btsLJ6MJZwy/JJf2BdfHugoCKSLYqjFIK0/img.jpg)
눈이 쌓이기가 무섭게 편을 갈라 눈싸움이 시작되죠. 환호성이 하늘로 퍼집니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죠. 한쪽 구석에선 눈사람을 만듭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서로 경쟁하듯 최대한 큰 눈사람을 만들려고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순식간에 눈과 동심은 하나가 됩니다. 그런 우리들을 어른들은 멀리서 지켜봅니다.
도시로 이사 온 후 중학생이 되어 겨울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눈이 싫어졌습니다. 눈 내린 날이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쌓인 눈을 치워야 했죠. 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낸 후, 대문 밖 골목길까지 치워야 했습니다. 눈을 다 치워야 비로소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f4kS6/btsLJzIDis1/KlWWaTM1Wcp8Bi6MJc44g0/img.jpg)
겨울이면 반복되었죠. 그때부터 눈이 싫어졌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 눈이 내린 날이면 성가시게 어른들은 얼른 일어나라 야단칩니다. 싫은 내색도 못하고 눈을 비비며 빗자루를 들 수밖에 없죠. 그땐 밤새도록 내린 눈이 정말 싫었습니다. 얄밉도록. 차라리 낮에 내렸으면 잠이라도 설치지 않을 텐데.
어른이 되니까 더 싫어졌습니다. 밤새 얼어 출근길이 얼어 버리면 어쩌나 싶었죠. 행여 지각할까 봐, 아니면 빙판길에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되니까요. 눈이 오면 은근히 마음을 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다 보니 눈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rVeWn/btsLJg3CPEt/j0F8KgKcnxZG8dHEQyO0q0/img.jpg)
눈은 미덥지 않은 존재로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러있었습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은퇴하고 나서입니다. 눈이 오면 오는가 보다, 겨울이니까. 무덤덤해졌습니다. 걱정할 상황이 없어진 겁니다. 그러다 반전의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계가가 된 건 사진입니다. 사진을 취미로 하면서 겨울이면 눈을 기다렸습니다.
삭막한 겨울, 딱히 찍을 게 마땅치 않거든요. 눈 내리는 사진을 찍고 싶은데, 눈이 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겨울 풍경은 눈이 이었어야 제격인데 말이죠. 사실 눈이 와도 실감 나게 사진으로 표현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처럼 사진상으로 잘 나타나지 않거든요. 경험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서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LVQTo/btsLJvlVhSL/N3fonmzuUjh3SA1Zod5Cv0/img.jpg)
늦은 밤, 눈이 오더군요. 일단 지켜봤죠. 나갈까말까 망설였죠. 날씨가 추워서. 그러다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나갔습니다. 함박눈이었습니다. 아파트 뒤 공원,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면 야심한 밤에 미친 짓 아냐. 할 수도 있습니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 하면서 눈과 데이트를 했습니다.
다시 동네 먹자골목으로 향했습니다. 오가는 인파가 많지 않았습니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니까요. 울긋불긋 네온사인 간판과 어우러진 밤거리에 솜사탕처럼 눈이 날립니다. 셔터를 눌러보니 낭만적인 도시의 밤 풍경입니다. 눈이 내리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장면이죠. 감성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겨울밤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dwHJpc/btsLIDLLsdC/waT30ZRT51ln5uYQGHwpz0/img.jpg)
눈 내리는 겨울밤, 아주 오래전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찹쌀떡~’ 어디서 나는 소리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잘못 들었나. ‘찹쌀떡~’ 똑같은 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먹자골목을 누비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조그만 캐리어를 끌면서 그가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아, 지금도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홀연 1970~80년대 겨울밤 풍경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처럼 정겹지 않았습니다. 2025년 새해 초, 눈 내리는 겨울밤에 듣는 ‘찹쌀떡~’ 소리가 어려운 서민의 삶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다고 난리인데…. 나는 그의 무거운 어깨를 한참 보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