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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눈오는 날 만나세요

by 훈 작가 2025. 2. 13.

“야, 눈 온다.”
 
순간 선생님과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창밖을 보았습니다. 중학교 국어 수업이 끝날 때 쯤이었죠. 눈이 이유 없이 수업을 멈추게 했던 겁니니다. 우린 함박눈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반겼습니다. 내리는 눈에 마음을 빼앗긴 우릴 보고 선생님은 더 이상 수업을 하지 않고 끝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던 거죠.
 
대학 시절 눈이 내리던 날, 전화로 눈이 온다며 소주라도 한잔 기울이자고 하는 친구가 그땐 좋았습니다. 눈은 그렇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우정의 메신저였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눈이 내리는 날, 선술집에서 친구와 마시는 술은 우릴 시인으로 만들고, 때론 철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암울했던 80년대 추억입니다.
 
그땐 눈이 꽃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였습니다. 술기운이 오르면 어느새 하얀 요정으로 보였죠. 앙증스러운 요정들이 바람과 함께 기죽은 청춘의 가슴을 어루만지듯 우릴 위로해 주곤 했습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춤을 추면 마치 무대를 수놓는 발레리나의 공연처럼 보이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죠.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죠. 창밖에 휘날리는 함박눈이 소환한 추억입니다. 그 시절 같지는 않지만, 눈이 펑펑 날립니다. 추억을 소환한 눈발이 유혹합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지만 듣는 척하지 않고 거침없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네요. 소란스러운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 눈이 순식간에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는 듯합니다.

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습니다. 잿빛 아파트 숲을 빠져나온 겁니다.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눈이 아니니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밀회를 즐기겠냐 싶었던 겁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죠. 하지만 겨울의 낭만 가객은 뭐니 뭐니 해도 눈이니까요.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느니 눈과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마치 실연당한 것처럼 측은해 보이지만, 눈을 맞으며 걷는 것은 시적이기도 하고 낭만적인 멋도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카메라를 둘러메고 그럴듯한 풍경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눈 오는 날엔 낭만과 감성을 이어줍니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도 하죠. 때론 마음과 마음을 이어줍니다. 아마도 첫눈을 기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겁니다. 친구든 연인이든 눈 오는 날 만나면 더 반갑죠. 아닌가요. 그게 우정이든 사랑이든 분명한 건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는 사실입니다.
 
눈 오는 날엔 망설이지 마세요. 그리고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리운 사람, 생각나는 사람에게. 그리고 만나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 보는 겁니다. 좋았던 추억, 마음 아팠던 것들을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거죠. 눈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듯 사람 관계도 더 돈독하게 만들어 줍니다. 차가운 이 겨울에 왜 눈이 오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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