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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북유럽

빛 내림

by 훈 작가 2023. 3. 21.

스톡홀름(Stockholm)에서 옌셰핑(Jönköping)으로 가는 중이다.  스톡홀름에서 옌 셰핑까지는 4시간 반 정도 걸린다. 차창 밖에는 비가 내리다 그쳤다 반복한다.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비 오는 날씨와 커피의 조합은 연인처럼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해외여행에서 마시는 커피는 조선시대 사약 수준일 때가 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로맨틱한 상상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스웨덴의 시골풍경이 여행의 지루함을 위로해 준다. 졸리는 눈을 난 애써 붙들고 씨름했다. 풍경 때문이다. 하늘가에 걸린 비구름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회색 하늘이 짓누르며 보슬비는 여전히 오락가락 내린다. 침묵이 흐르는 공간에 여행의 피로를 뿜어내는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에 유채꽃 풍경이 들어왔다. 한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다.

꽃 풍경이 다 지나가자. 호수가 보였다. 베테른(Vattern) 호수다. 차창에 사선을 긋던 빗줄기가 그쳤다. 한없이 이어지는 호수 풍경이 식상할 정도다. 그 순간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호수 수면 위로 내렸다. 졸음이 확 달아났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는 빛 내림(틴들현상:Tyndall phenomenon) 현상이다. 따분함을 못 이겨 낮잠을 연인처럼 껴안고 달콤한 유혹에 빠졌더라면 후회할 뻔했다.


빛 내림 사진은 찍고 싶어도 내 마음 같지 않은 사진이다. 자연현상은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만날 수 없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프로작가들이 찰나의 순간을 담은 사진 전시회에 기보면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감동을 전해주는 작품 사진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많다. 그런 장면을 지금 이 순간 만난 것이다.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문제는 달리는 차 안에서 어떻게 찍느냐이다. 저 장면을 건질지 못 건질지 자신이 없다. 사진을 배울 때 수강생 한 분이 강사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저런 사진을 찍었어요?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짧은 그 한마디에 모든 답이 있었다. 물론 질문자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정답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답이 없는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사진을 찍는 기술적인 숙련도는 오랜 시간 출사 경험을 통해서 터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발품을 팔다 보면 예기치 않은 기회의 순간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는 것에 답이 있는 게 아니다. 사진은 내가 답을 만드는 것이다. 빛 내림은 그 순간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찍은 사진이다. 수능 문제라면 딱 떨어지는 답이 있을 텐데.
  
여전히 코 고는 소리가 진동했다. 카메라를 꺼내 스위치를 켜고 대충 감으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셔터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뒤섞여 이중창을 만든다. 카메라에 담은 이미지를 다시 본다. 만족이란 단어에 근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빛 내림 사진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작은 후회가 밀려왔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놓치면 다른 사람이 잡을 뿐이다 행운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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