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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그림자

by 훈 작가 2025. 5. 9.

봄비가 날 죽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슬퍼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의미 없는 삶을 살아온지라 죽음이 슬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조차 없는 나의 죽음은 그래서 장례식이 없습니다. 당연히 근조화환이나 조문 행렬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참 이상한 죽음입니다.
 
비가 그친 다음 날, 빛이 나를 부활시켰습니다. 난 다시 살아났습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 전과 같이 나는 내가 되고, 네가 되어 거리를 누빕니다. 하지만 영혼 없는 존재입니다. 뜨거운 심장도 없습니다. 유일한 언어가 침묵입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누군가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다 밤이면 당신과 헤어져 어둠 속에 누워 잠이 듭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난 스토커는 아닙니다. 내 스스로 흑심을 품을 수도 없고, 애초부터 욕망이란 게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혼자 삽니다. 딱히 정해진 주거지가 없습니다. 있다면 빛과 어둠의 경계쯤 될 겁니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선 본능적으로 당신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 존재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경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당신이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픈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날, 난 기억할 겁니다. 당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이 훌륭했다는 사실을. 그때 당신을 곁에서 지켜 온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도 떠날 겁니다. 아마 그때도 봄비가 내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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