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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두루미와 멍 때리기

by 훈 작가 2024. 7. 10.

두루미 한 마리가 멍 때리기 하듯 호수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멋지게 찍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내가 의도한 대로 그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주어진 풍경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기에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카메라에 갖고 있는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 빛을 묘사하는 게 최선입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고 싶은데 두루미가 눈치채고 날아갈 것 같아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생각보다 녀석은 귀가 밝습니다. 전에도 조심스레 이 정도면 되겠지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녀석은 도망가곤 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많지 않아 오늘만은 반드시 실패하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접근했습니다.
 
조리개를 맞추고 렌즈를 들여다보며 화각과 구도를 잡았습니다. 숨죽이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호수 물빛이 날아가 하얗게 보입니다. 흑백의 조화를 이룬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찍혔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해뜨기 전의 호수는 잔잔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합니다. 녀석이 날아가기 전에 서둘러 몇 컷을 더 찍었습니다.
 
사진을 다 찍고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추었습니다. 호수 쪽으로 더 들어가려면 녀석이 있는 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녀석이 멍 때리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지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아무래도 방해가 될 것 같아 잠시 서 있기로 했습니다. 나도 핑계 삼아 녀석을 보며 멍 때리기 하듯 사색의 시간을 가져 봅니다.
 
사색의 공간은 하얀 여백입니다. 그 여백에 무얼 그리고, 무얼 넣어야 할지는 생각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도 필요할 겁니다. 문제는 그런 시간을 어떤 곳에서 갖느냐 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시끄러운 도심에서는 좋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복잡한 도심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이 좋습니다.
 
회색 도심의 일상은 알게 모르게 소음 공해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한시도 손에서 뗄 수 없는 스마트 폰부터 거리에 꼬리를 물고 다니는 자동차의 거친 숨소리, 카페에 가면 주변의 잡담과 음악 소리,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TV에서 토해내는 뉴스나 드라마 아니면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웃음소리. 우린 그 속에서 그러려니 하며 삽니다.
 
사색의 시간과 나만의 여백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현대인의 일상은 스트레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항상 먹고살기 바빠서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수록 일상탈출의 목마름을 느낍니다. 작은 행복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색의 시간과 데이트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사진처럼 호수 멍 때리기도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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