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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단편소설18

‘사랑하면 안 되니’ 를 마치며(9) 당당하게 사랑하라 세상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랑도 그런가 봅니다. 언제나 뜨거울 것 같았던 사랑도 이런저런 이유로 변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사랑의 변심은 이별과 상처를 만듭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이혼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을 빗대어 ‘돌싱’이란 신조어가 언제부터인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의미를 몰라 생소하게 들렸습니다. 이혼은 숨기고 싶은 단어입니다. 흉이면 흉이지, 자랑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픈 단어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버젓이 TV 전파를 타고 안방에 들어옵니다. 이른바 ‘돌싱’ 프로그램입니다. 어쩌면 시대가 변한 사회적 현상의 반영이 아닌 가싶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달라졌단 뜻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종착역이 결혼이면, 결혼은 사랑의 한 가정의 출발.. 2024. 1. 16.
사랑하면 안 되니(8) 가출 학교 선생님과 상의해 인근 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했다. 같은 반 학생들과 방과 후 학교 주변 피시방부터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봤다. 학교를 중심으로 수현이 컬러사진과 신체적 특징이 인쇄된 전단도 만들어 돌리고, 어릴 때 외할머니 품에서 자라다시피 한 애라 외갓집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운대 집에 전화도 해 보았다. 친정엄마는 네 아버지 아시면 화낼 게 분명하니 얼른 전화를 끊으라 했다. 하지만 친정엄마는 어찌 된 일이냐고 다시 큰딸에게 전화했다. 윤민수도 아들을 믿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녀는 마음을 일찍 열었어야 했다고 대답했다. 엄마를 닮았으면 절대 나쁜 일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위로하자 차은희는 윤민수에게 자신을 버리면 안 된다고 울먹였다. 윤민수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한 .. 2024. 1. 15.
사랑하면 안 되니(7)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깐 잔 것 같은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무거운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설거지하기 전 전기밥솥 스위치부터 누른 후 아들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고 있다. 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문을 닫고 주방에 와 설거지를 한 후 커피포트에 물을 부어 코드를 꽂았다.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울려댄다. 원두커피 한 잔을 내려받아 식탁 한쪽 의자에 앉았다. 짙은 커피 향을 차은희의 영혼을 어루만지듯 코로 들어왔다. 지난날 치열하게 살아온 덕에 사회생활은 승자였다. 하지만 사랑만은 아니다. 이번만은 패자로 남고 싶지 않다. 아들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어떻게 설득해야 오해가 풀릴까. 마음만 답답하다. 그때 수현이가 .. 2024. 1. 14.
사랑하면 안 되니(6) 사춘기 “아들! 부탁하나 들어줄래?” 차은희가 아들 방을 노크하며 말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지, 아들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살짝 문을 연 아들이 묻는다. “뭔데?” “엄마 방, LED 형광등 하나 나갔는데, 좀 바꿔 줄래?” “사다 놓았어?” “파우더 룸 거울 앞에 있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럼, 피트니스클럽 다녀올게. 부탁해?” “알았어.” 일요일 오후, 피트니스클럽은 여유로웠다. 회원들이 많이 나들이 간 모양이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 러닝머신에서 20분가량 땀을 흘렸다. 약간 숨이 차다. 3~4분 정도 쉰 다음 근력 운동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빈 헬스 기구가 많이 보였다. 일주일에 3번은 와야지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기껏해야 2번이다. 앉아 있으면 쓸데없는 잡념이 생각날.. 2024. 1. 13.
사랑하면 안 되니(5) 사랑하면 안 되니 금요일 저녁 퇴근길, 차은희는 윤민수와 아들 문제를 상의해 보고 싶어 만나자고 했다. 코엑스 인근에 있는 G 호텔 커피숍에서 보자고 했더니 그가 알았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No’라고 대답하는 법이 없다. 데이트 초기엔 혹시 선수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심에서 나오는 배려였다. 속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차가 막힐 것 같아 일찍 나왔는데 길이 뻥 뚫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커피숍 안쪽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맑은 샘물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청아한 피아노 선율이 차은희에게는 힐~링 음악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바탕 화면에 깔린 아들 사진을 보면 언제나 힘.. 2024. 1. 12.
사랑하면 안 되니(4) 여름방학 6월 어느 날, 윤민수가 프라하 여행을 제안했다. 차은희는 고민스러웠다. 정말 믿어도 될까.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이 남자, 정말 마지막 사랑일까. 생각하며 일단 중3인 아들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더니 그는 더 이상 여행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같이 여행을 떠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윤민수가 프라하 이야기를 꺼낸 건 7월 초였다. 방학 동안 기숙학원에 보내면 갈 수 있다고 설득하자, 차은희는 그런 방법이 있었나 싶었다. 며칠 숙고 끝에 아들에게 기숙학원 얘기를 꺼냈다. 수현이가 안 가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은 엄마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차은희는 그렇게 프라하 여행을 다녀왔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허니 문 여행도 아닌데 전에 .. 2024. 1. 11.
사랑하면 안 되니(3) 소개팅 지난봄, 성당에 다니는 지인 소개로 7살 연상인 윤민수를 만났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딸이 하나 있고,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다. 처음에 소극적이던 그가 조금씩 다가왔다. 만나보니 따뜻한 사람 같았다. 남자 혼자 딸 키우며 유학비 보내느라 모든 걸 포기하고 돈만 벌었다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결혼 전 그의 아내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H 여행사 가이드로 일했고, 그 덕분에 결혼 후 딸아이 방학 때마다 해외여행을 안 가본 데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녔다고 했다, 그런 아내가 딸아이 유학 떠나기 1년 전 췌장암으로 주님 곁으로 떠난 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재혼은 딸 때문에 애초부터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그는 숫기가 없는 남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친.. 2024. 1. 10.
사랑하면 안 되니(2) 이혼녀 7년 전, 차은희는 자신이 쌓은 사랑의 성벽을 허물어야 했다. 외도하는 남편을 용서할 수도 없었고, 자존심 없는 여자처럼 매달리기도 싫었다.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아들 때문에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만, 이혼을 결정했다. 사랑에 감정을 소비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편에게 상처받으며 사는 것도 두려웠다. 그날 이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혼의 대가는 혹독했다. 폐허가 된 성터에 시베리아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밤마다 외로움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다. 사랑을 그녀의 성(城) 밖으로 내던진 이후 상처투성인 가슴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운명 같은 .. 2024. 1. 9.
사랑하면 안 되니(1) 프라하의 밤 “아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알게 되면 불륜이라고 난리 칠 것 같아서요.” “아직은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잖아요.” “중3이니 다 알 거예요.” 차은희가 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흑맥주 맛이 생각보다 좋다. “한 잔 더 시킬까요?” 윤민수가 말했다. “좋아요.” “Excuse me. One more dark beer, please.” “흑맥주 맛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사람들은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가 독일인 줄 알거든요.” “그럼, 어디죠?” “체코예요.” “아, 그래요.” “맥주는 크게 라거(Lager)와 에일(Ale) 두 종류가 있어요. 라거는 효모를 8~12도에서 25~30일간 발효시켜 맛이 깔끔하고 청량하죠, 에.. 2024. 1. 8.
살구(9) 할멈의 행방불명 신고를 받은 119 구조대가 마을에 도착했다. 용식 할멈이 마실 왔다가 인기척이 없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기에 문을 열어 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구조대원과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봤지만, 할멈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수색작업은 내일 아침에 재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과 딸, 사위는 불안했다. 딸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웃으시며 반기던 엄마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들도 침울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갔다. 방바닥에 은행 대출서류가 보였다. 연필로 그려준 동그라미에 엄마의 도장이 찍혔다. 달빛 아래 살구나무와 덩그러니 빈 개집. 어쩌면 엄마에게 살구가 있으니, 무사할지도 모른다고, 남매는 희망을 품었다. 이튿날. 마을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수색작.. 2023. 10. 25.
살구(8) 할멈은 은행 서류에 도장을 찍을지 말지 고민했다. 맞벌이하는 데 왜 대출을 받는다고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애들 학군인지 뭔지 때문에 이사 가야 한다는 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엄마다. 통화해도 괜찮니?” 할멈이 고민 끝에 딸에게 전화했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어제 동생이 왔다 갔어. 그런데 아직도 대출받아야 한다며 도장 좀 찍어 달라고 난리다. 어떡하면 좋냐?” “엄마. 해 주면 안 돼. 나중에 쫓겨나면 어떻게 하려고. 올케 하는 거 보면 뻔해. 안 모실 거라고. 그럼 엄마 갈 데는 요양원밖에 없어. 내가 모시려고 해도 시부모 다 살아계셔서 힘들어. 알잖아? 엄마.” 할멈이 고민 끝에 마음먹은 생각을 딸이 극구 반대했다. “그래. 알았어.” “엄마! 절대 안 돼. 알았지.” 살구가 공을.. 2023. 10. 24.
살구(7) 어제저녁 느닷없이 아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았다. 할멈은 마을 어귀로 나와 아들을 기다렸다. 살구가 느티나무 정자 주변을 한가로이 왔다 갔다, 하더니 언덕으로 올라갔다. BMW 승용차가 마을로 들어와 마을회관 공터에 멈추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내렸다. “왜 둘만 와?” 할멈은 손자가 더 보고 싶었다. “할머니 집은 화장실이 무섭다며 안 가겠다는데 어떡해….” 아들이 투덜거리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봄에 아파트처럼 다 고쳐 놓았는데….” 할멈이 서운해서 말끝을 흐렸다. 건강은 어떠냐고 안부를 묻는 며느리가, 할멈은 달갑지 않았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살구가 길을 안내하며 앞장섰다. 할멈이 손자 손녀가 학교에 잘 다니는지 묻지 않았다. 아들이나 며느리의 대답은 무성의할 것이고, 둘의.. 2023. 10. 23.
살구(6) 마당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있어?” 할멈이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문을 열었다. 용식 할멈이 왔다. “해가 중천인데 자고 있었어?” “들어와.” “술 마셨어? 소주 냄새가 나는데.” “어제저녁 하도 적적해서 월류정에서 조금 마셨어.” “아이고 나라도 부르지. 할망구야.” “요즘. 내 맘을 나도 모르겠어. 자꾸만 허전한 게. 이 나이에 내가 계절을 타나?” “아직도 청춘이구먼. 하하하.” “내일모레. 수요일. 읍내에서 KBS 전국노래자랑 녹화방송이 있다는 데. 같이 구경이나 가지.” “전국노래자랑?” “다들 송해 오빠 보러 가자는데.” “그럼 나도 가지 뭐.” 모처럼 단장하고 나섰다. 살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할멈 뒤를 따라왔다. 동네 노인들도 한껏 멋을 내고, 버스정류장에 모였다. 마을이 텅 비.. 2023. 10. 22.
살구(5) 추석에도 할멈은 설에 이어 혼자 성묘를 다녀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고향을 누가 지키며 살 것인가. 시골은 고령화되어, 나이 육십이 면 청년이라는 말을 듣는 게 현실이다. 이대로 가다간 농촌이 사라질지 모른다. 걱정이다. 점심을 거른 채 TV를 켰다. 추석 특집 전국노래자랑이 방송되고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프로였다. 재미있게 TV를 보는데, 살구가 멍멍 짖었다. 문을 열자 옆집 용식 할멈이 왔다. “뭐 해?” “뭐 하긴 송해 오빠 보고 있지. 용식이 올라갔어?” “고속도로 막힌다고 차례상 물리자마자 바로 올라갔어.” “할멈 아들은 안 왔어?” “부잣집 며느리 얻었다고 다들 부러워했는데. 장가가니까 소용없구먼.” “품 안에 자식이래잖아.” “예전엔 마을회관에서 윷놀이에다가 막걸리 한 사발 기울.. 2023. 10. 21.
살구(4) “벌초를 왜 힘들게 엄마가 해? 아들은 뭐 하고?” 딸은 남동생이 너무하다며, 할멈에게 투덜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올케가 엄마를 모시지 않으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바빠서 못 온다는 데, 어쩌겠냐? 나라도 해야지.” 할멈은 아들을 감싸며 에둘러 핑계를 댔다. “장모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저쯤에서 멈칫거리던 사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늙은이 몸이 그렇지. 뭐. 그나저나 자네 사업은 어떤가?” “미국산이다. 호주산이다, 수입 쇠고기가 워낙 많이 들어와 힘들죠.” “큰일이네. 이러다 축산농가 밥이나 먹고살 수 있는지 모르겠어. 과수농가도 바나나다 망고다 해서 수입 과일 때문에 힘든데….” “장모님. 힘들긴 해도 거래처 절반은 농협 매장이라 든든한 편이에요.” “엄마. 사위가 지난달 한우영농조.. 2023. 10. 20.
살구(3) 추석을 앞두고 할멈이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놀고 있는 살구를 쳐다보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 네 팔자도 어지간하다. 어쨌거나 지난 일은 다 잊어. 알았지?” 조끼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 벨이 울렸다. “엄마! 별일 없지?” 며느리를 앞세워 왔다 간 아들이 뜬금없이 전화했다. “별일은 무슨 별일, 벌초하러 언제 올 거야?” 추석이 다가오니, 먼저 저승 가신 영감의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해야 할 것이므로 할멈이 물었다. “엄마! 요즘 누가 벌초를 해. 대행업체에 맡겨.” 아들이란 놈이 불효를 당연하게 투덜거렸다. “오기 싫으면 그만둬. 말하는 내 입만 아프지. 됐고, 추석에 올 거지? 손자 얼굴이라도 보여줘야지.” 할멈은 화가 났지만, 손자는 보고 싶었다. “….” 대답은 없고, 곁에 붙어 앉은 며느.. 2023. 10. 19.
살구(2) “웬 개여? 장날 사 왔는가?” 할멈이 마실 오지 않으니, 용식 할멈이 왔다. “누가 버린 거 같아 데려왔어.” 앉을자리를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잘 됐구먼 그려. 검둥이가 죽고 나서 많이 적적해하더니만.” 용식 할멈이 마루에 걸터앉아 살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똥개는 아닌 거로 보이는데. 이름이 무엇이여?” “이름? 살구여.” “고향의 봄. 노래에 나오는 그 살구?” “맞아, 그 살구.” “듣고 보니 괜찮네.” “오늘 장날이라. 고추 좀 내다 팔러 갈 건데. 같이 가시려나?” 용식 할멈이 장에 갈 것인지 물었다. “지난 장에 갔다 왔어.” 할멈이 마른 고추 자루를 머리에 이고 장터로 나섰다. 살구가 촐랑촐랑 따라왔다. 늘 다니는 길인데, 장에 가는 날만큼은 멀게 느껴진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할멈.. 2023. 10. 18.
살구(1) 늘 그러했듯, 새벽닭이 울자, 할멈이 산책을 나섰다. 들녘을 한 바퀴 돌고 마을 초입의 느티나무 정자를 지날 때, 마루 밑에 엎드린 낯선 개 한 마리가 보였다. 할멈이 다가가자, 녀석이 일어나 뒷걸음질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놈아! 어디서 왔어?” 할멈이 개와 눈을 맞추며 쪼그려 앉았다. “멀뚱멀뚱 쳐다만 보지 말고 이리 와. 어서.” 녀석은 겁먹은 듯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세히 보니, 상처 난 오른쪽 뒷다리에 피가 엉겨 붙은 채 파르르 떨었다. “버릴 거면 애초부터 키우지 말아야지. 누가 이런 시골에다 버렸을까?” 안쓰러운 표정으로 할멈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 집으로 향하던 할멈이 몇 걸음 가다 뒤를 보았다. 개도 할멈을 뚫어질 듯 쳐다본다. 아침 햇살이 기지개를 켜며 올라왔다. 경운기가 느티.. 2023. 10. 17.